DMZ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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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바다위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쳤나니”
정부는 광복 70주년이자 6ㆍ25전쟁이 발발한 지 65년이 되는 올해 국민들이 호국 영웅들을 기리는 호국영웅 알리기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다. 정책브리핑은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호국영웅들의 활약을 소개하고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억해본다. (편집자 주) 대한민국 해군 창설의 주역인 손원일 제독은 1909년 5월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에서 종교인이자 항일 독립투사였던 손정도 목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930년 상해 국립중앙대 농학원 항해과를 졸업한 후 1945년 조국광복과 더불어 해군창설에 투신했다. 그는 대한민국 해군이 정식 발족됨에 따라 초대 해군총참모장으로 취임했다. 손 제독은 1950년 6월 25일 전쟁발발 첫날부터 북한 공산군의 해상침투를 막아서며 유엔해군과 더불어 동ㆍ서ㆍ남해에서 제해권을 확보했다. 해군 총참모장으로 북 해상상륙 무력화 그는 예하 전 부대에 비상경계 돌입과 전투준비에 임할 것을 명령하고 동ㆍ서ㆍ남해의 해상경비를 강화하는 등 해군총참모장으로서 6ㆍ25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공헌했다. 특히 개전초기 옥계해전과 PC 701함의 해전 승리는 초기의 승리라는 상징성 뿐만 아니라 제해권 확보라는 전략적 의의가 내포돼 있었다. 당시 동해안을 따라 남침한 북한군 제766유격부대는 옥계 등지의 해안을 공격목표로 6월 25일 새벽 4시 해안상륙을 시도했다. 동해안 경비임무를 담당하고 있던 YMS 509정이 묵호항에 정박하고 있었고 적의 상륙 사실을 보고받은 사령관은 이를 해군본부로 타전했다.동시에 YMS 509정의 현지출동을 명령했다. 묵호경비부사령관으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은 손 총참모장은 즉시 “긴급출동 지시, 북한수송선단 남침, 옥계 해안에 적군 상륙 중, 긴급 출동하여 격침하라”는 전문을 YMS 509정에 하달했다. 대한해협해전에서 맹활약한 해군 백두산함 인천상륙작전 등 해상 주요작전 승리 이끌어 6시에 묵호를 출항해 북상한 509정은 짙은 안개로 시계가 불량한 해상을 2시간 동안 항진한 끝에 한 척의 배를 발견했다. 아군의 경비정으로 오인한 509정이 발광신호를 보내며 접근해가자 상대편 배는 509정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509정도 37㎜포와 중기관총으로 사격을 가해 붉은 인공기가 휘날리고 있는 적함의 철판을 명중시켰다. 50분간 교전을 벌이던 적함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북으로 도주했다. 509정은 피격된 선수를 수리하기 위해 묵호로 귀항한 뒤 긴급수리를 마치고 교전을 벌였던 해역으로 다시 출동했다. 하지만 적은 이미 상륙한 후였다. 오후 5시 30분 509정은 해안선에 있던 상륙정 1척을 완전 격파하고 또 다른 발동선 1척을 노획해 묵호경비부에 인계하는 전과를 거뒀다. 이 전투를 계기로 대한민국 해군은 동ㆍ서ㆍ남해 제해권을 확보했으며, 이후 통영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동ㆍ서해안 철수작전, 동ㆍ서ㆍ남해 해상봉쇄 및 소해작전 등 해상 주요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 정부는 해군육성과 확장에 전심전력을 경주하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공헌한 해군총참모장 손원일 해군 중장에게 1953년 4월 5일 금성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1953년 6월 해군총참모장(해군중장)으로 예편했고, 같은 해 8월 제5대 국방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국군의 날과 현충일 등을 제정했다.[자료제공 :(www.korea.kr))]
- 관리자
- 2015-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