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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

시계바늘은 고장나지 않았다

잠시 멈춰있을 뿐

  

 

시간은 모든 곳에서 공평하게 흘러갑니다. 우리가 DMZ에 남겨두고 온 것이 비단 전쟁의 상흔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루지 못한 통일의 꿈을 묻혀있는 그곳에서 우리는 멈춰진 역사의 시계바늘을 다시 돌려야 합니다. 통일이 되는 그 날을 향해 힘차게 째깍이도록.

 

 

<남방한계선 추진 철책> 사진_김창환(강원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

<남방한계선 추진 철책> 사진_김창환(강원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 

 

 

 

 

분단의 시작, 북위 38˚선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우리나라는 꿈에도 그리던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우리 민족의 힘만으로 온전한 독립국가를 이루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재편성되기 시작한 세계 정세의 흐름이 너무도 거셌기 때문이다. 

 

‘38˚선’은 원래 일본의 항복과 무장해제 문제를 해결하려는 군사작전 상의 업무 분담을 위해 일시적으로 설정한 행정상의 선이었다. 38˚선 이북은 소련이, 이남은 미국이 각각 군정을 실시하며 전후처리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생각은 달랐다.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고자 했던 소련은 38˚선 곳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기관총을 설치했으며, 주요 철도와 도로를 차단하는 등 남북 간에 장벽을 치기 시작했다. 결국 소련의 군정이 실시된 지 약 4개월 만에 38˚선 이북에서는 김일성을 정점으로 한 공산화 체제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 <소련이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내세워 수립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소속위원들 모습> 사진_국가기록원

    <소련이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내세워 수립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소속위원들 모습> 사진_국가기록원

  •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초대대통령 취임, 제3회 광복절 기념> 사진_국가기록원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초대대통령 취임, 제3회 광복절 기념> 사진_국가기록원

 

 

당시 38˚선 이남은 미군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정치적 구심점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세계 정세가 냉전으로 치달으면서 소련의 한반도 독점을 막아야한다는 미국의 위기감이 커지자 남한에서도 통일정부보다는 단독정부 수립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강해졌다. 결국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설치되었고 남한만의 총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38˚선을 경계로 남한에는 대한민국 민주정부, 북한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해방과 함께 통일국가를 건설할 기회는 사라지고 민족과 국토의 분단이 고정되고 만 것이다.

  

  

■ 한반도 분단의 배경

 

한반도 분단의 배경

 

 

 

 

잊을 수 없는 비극, 6.25 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소련의 지원을 받아 최신 무기로 무장한 북한이 38˚선을 넘어 남침을 감행했다. 불과 5년 전까지도 일제에 대항해 함께 싸웠던 한 민족이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게 된 비극의 첫 걸음, 6.25 전쟁의 시작이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무력공격을 ‘침략행위’로 선언하고 회원국들의 지지를 호소하는 한편 한반도에서 유엔의 군사 활동을 위해 미국에 최고지휘권을 위임했다. 북한의 초반 기세는 무서웠다. 사흘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9월 중순에는 낙동강까지 전선을 확대시켰다. 전세가 역전된 것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부터였다.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9월 26일 서울에 진입했고, 9월 28일에는 서울을 완전히 되찾았다.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우리 국민들은 다시금 통일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생각은 달랐다. 소련과 중공이 전쟁에 개입할 위험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미국은 6.25 전쟁이 강대국들 간의 전면 전쟁으로 번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전쟁은 계속되었지만 우리측 지상군 및 공군이 소련이나 중공의 국경을 넘는 것이 금지됐다. 소련과 중공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국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공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38˚선을 사이에 두고 교착상태에 빠졌다.

 

 

  • <북한군과 대치중인 미 해병>사진_국가기록원

    <북한군과 대치중인 미 해병>사진_국가기록원

  • <국군 평양입성 환영대회>사진_국가기록원

    <국군 평양입성 환영대회>사진_국가기록원

 

 

 

 

휴전 회담, 그리고 멀어진 통일의 꿈

  

  

미국의 38˚선 부근에서 현상태 유지라는 제한적인 전쟁방침에 따라 전쟁이 장기화될 기미가 보이자 소련 유엔 대표인 말리크(Malik.J.)는 1951년 6월 23일 총회연설에서 휴전을 제안했다. 북진통일을 추진하던 우리 정부는 휴전을 반대했지만 결국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첫 번째 휴전회담이 열렸다. 1953년 7월 27일 최종 정전협정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2년 넘게 계속된 지루한 공방전의 시작이었다. 회담은 처음에는 비교적 원활히 진행되었지만 이내 문제에 부딪쳤다. 양군의 군사분계선 책정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이미 38˚선을 넘어 진출하고 있었던 미군은 양군의 접촉선을 따라 결정하자고 주장한 반면 공산군측은 38˚선의 원상회복을 고집했다. 회담은 중단되었고 전투는 다시 격렬해졌다. 약 2개월 후 판문점에서 다시 휴전회담이 재개됐을 때 공산군측은 유엔군측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군사분계선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 <휴전회담 모습> 사진_국가기록원

    <휴전회담 모습> 사진_국가기록원

  • <1951년, 정전반대 시민궐기대회 모습> 사진_국가기록원

    <1951년, 정전반대 시민궐기대회 모습> 사진_국가기록원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등장했다. 포로송환 문제였다. 포로의 강제송환이냐 자유송환이냐를 놓고 의견 대립이 심해지면서 회담은 다시 중단됐다. 휴전을 반대하는 우리 정부의 입장 또한 강경했다. 이미 많은 인명과 재산을 잃은 전쟁을 ‘분단’으로 마감할 수는 없었다. 휴전을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되었고 이승만 대통령도 휴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지만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전투가 계속되고 국군 방어선에 대한 집중적인 공격이 이어지자 결국 휴전에 동의했다. 그렇게 3년 넘게 이어지던 전쟁은 끝이 났고, 평화 아닌 평화가 한반도에 드리워졌다.

  

  

■ 6.25참전국 현황 - 전투부대 파견국

 

6.25참전국 현황 - 전투부대 파견국

국가명 

참전 연인원(명)

국가명

참전 연인원(명)

미국 

1,789,000 

터키 

14,963 

영국 

56,000 

타이 

6,326 

오스트레일리아 

8,407 

그리스 

4,992 

네덜란드

5,322 

남아프리카공화국 

826 

캐나다 

25,687 

벨기에 

3,498 

뉴질랜드 

3,794 

룩셈부르크 

83 

프랑스 

3,421 

콜롬비아 

5,100 

필리핀 

7,420 

에티오피아 

3,518 

총계 

 1,938,330

※ 출처 :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 6.25참전국 현황 - 의료지원 및 시설파견국

 

6.25참전국 현황 - 의료지원 및 시설파견국

국가명 

참전 연인원(명) 

지원부대 및 시설 

스웨덴 

1,124 

적십자 병원 

인도 

627 

제60야전병원 

덴마크 

630 

병원선 

노르웨이 

623 

이동 외과병원 

이탈리아 

128 

제68적십자병원 

총계 

3,132 

- 

※ 출처 :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 6.25 전쟁의 인적피해 현황

 

6.25 전쟁의 인적피해 현황_한국군 및 유엔군 피해

 

6.25 전쟁의 인적피해 현황_남북한 민간인 피해

 

※ 출처 :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아픔을 묻고 희망의 씨앗을 뿌리다

 

 

3년 넘게 계속된 전쟁과 2년간의 지지부진하던 휴전회담은 1953년 7월 27일, 유엔군측과 공산군측이 준비한 18개의 문서에 각자 서명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한국어, 영어, 중국어로 작성된 그 문서들이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 전쟁포로의 처리 문제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는 정전협정서였다. 한반도를 남북으로 어떻게 얼마나 갈라놓을 것인지 조목조목 지정해둔 그 문서에 따라 같은 하늘 아래 있는 우리의 산과 들은 둘로 나뉘었다. 그리고 전쟁 이전보다 더욱 공고한 분단의 벽이 우리 앞에 세워졌다. 

 

 

  • <정전협정이 조인되던 날의 판문점 휴전회담장>사진_국가기록원

    <정전협정이 조인되던 날의 판문점 휴전회담장>사진_국가기록원 

  • <정전협정 양측 수석 대표 북한 남일과 미국 조이 제독>사진_국가기록원

    <정전협정 양측 수석 대표 북한 남일과 미국 조이 제독>사진_국가기록원

 

 

철조망 너머 갈 수 없는 땅에도 풀과 나무 사이로 강물이 흐르고, 새들이 날아오르며, 동물들이 뛰어놀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우리에게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여전히 시간은 흐르고, 역사도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며 미래로 나아간다. 여전히 군사적 긴장감이 흐르는 곳이지만 우리는 DMZ를 마냥 ‘갈 수 없는 땅’으로 놓아둘 수는 없다. 이 땅 어딘가에서 통일의 희망이 다시금 솟아오르길, 언젠가 둘로 나뉜 산과 들이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정보등록

2014.08.11.

  

정보확인

2016.09.19.

2017.04.07. 

 

출처

  • 『미래를 위해 남겨 놓은 과거, DMZ』(2010), 함광복, 통일부 통일교육원

  • 『한국전쟁(上)』(1995), 국방군사연구소

  • 『평화와 생명 그리고 번영을 위한 ‘DMZ 60주년’』(2013), 강원도/강원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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