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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만에 만난 남편…“살아 있어줘서 고마워요”
1950년 6월 25일 평범한 일요일에 시작된 전쟁. 한국전쟁은 한반도 역사상 가장 아픈 역사로 우리 모두 기억하고 있다. 당시 충북 청원군 가동면 하대리 어느 마을에도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다. 지난 제20차 남북 이산가족상봉에서 65년만의 부부 상봉으로 화제가 된 이순규(84), 오인세(83) 씨. 그 중 남쪽에 사는 이순규 할머니를 상봉 이후 만났다. 결혼 7개월 만에 남편 오인세(83) 씨와 헤어져 65년간 홀로 아들을 키운 이순규(84)할머니가 인터뷰 내내 환하게 웃고 있다. 19살 때 헤어져 이제 백발 할머니가 됐지만 인터뷰 내내 수줍게 웃는 모습은 영락없는 당시 새색시의 모습이었다. 6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편이 사용하던 요강과 구두를 비롯해 바느질 그릇 등 결혼 당시 폐물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오 씨. “내 인생이 고스란히 다 담겨있으니 버릴 수가 없었다”는 말 속에 그녀의 인생이 모두 녹아 있는 듯 하다. - 65년 만에 남편과 만났던 당시 상황이 생생하실 텐데요. 그 때 느낌이 어떠셨나요? 살아있다는 게 기쁠 뿐이었습니다. 남편이 다른 상봉단 보다 늦게 들어왔습니다. 모두 흥분한 상태였고 우리 주변에 보도진들이 너무 많아서 무슨 생각을 할 겨를 없이 당황한 상태였습니다. 무슨 말을 한 지 기억도 안 납니다. 남편이 울지 말자고 했고 우리는 울기보다 웃었습니다. 2박 3일 상봉 일정은 2시간씩 첫째 날 2번, 둘째 날 3번, 마지막 날 작별상봉 1번 총 6번 12시간 만났습니다.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제대로 얘기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작 할 이야기는 하나도 못 하고 바라만 보기만 한 것 같습니다. 남편 얘기만 듣다가 시간이 다 갔죠. - 남편을 첫 눈에 알아보시겠던가요? 남편이 시숙이랑 아들이랑 손자랑 다 닮아서 쉽게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아들이랑 손을 비교해봤는데 그렇게 닮을 줄 몰랐습니다. 손자는 남편 어릴 때 사진을 보고 자기 사진인 줄 알더라.(웃음) - 결혼 약 7개월 만에 헤어지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별 당시를 설명해주시죠. 내 나이 19살에 남편에게 시집간 후 정확히 6개월 26일 만에 헤어졌습니다. 1949년 11월 결혼해서 이듬해 전쟁이 났어요. 전쟁 중이던 7월 갑자기 훈련에 다녀온다고 했죠.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이 내가 부엌에서 안 가면 안 되냐고 물었더니 “열흘만 훈련받으면 돌려 보내준다”고 했다며 걱정하지 말라 했습니다. 남편은 당시 내 뱃속에 아들까지 있었기 때문에 발길이 쉽게 안 떨어졌지만 금방 돌아올 수 있다는 약속에 집을 나섰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할머니는 그 당시 생각이 나는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밖에서 기침소리만 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열어보고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렸습니다. 인터뷰 도중 남편 생각이 나는지 먼 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이순규 할머니. - 아드님은 당시 태어나기 전이어서 이번이 아버지와의 첫 만남인데 두 분이 나눈 첫 대화를 전해주신다면? ‘나도 아버지가 있다’ 큰소리쳤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난 아버지 없는 자식이 아니고 아버지 있는 자식이라고 당당하게 살겠다’고 했습니다. 평소 아들은 아버지가 없다고 포기하고 살았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의지할 생각조차 안 했습니다. 어느 해 한 번 힘들 때는 ‘나도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북쪽에 살아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돌아가신 줄 알았기 때문에 그리워할 수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나도 아들도 이산가족 상봉을 앞두고 충격보다는 감사함이 더 컸습니다. 오히려 남편이 놀랐습니다. 남편은 아들과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지 모르고 누나들을 찾으려고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했었습니다. 하지만 사망한 누나들 대신 나와 아들의 생사가 확인돼 만날 수 있게 됐죠. 남편은 상봉 3일 전 평양에 도착해서야 아내와 아들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 남편과의 생이별 후 65년 동안 시부모를 공양하고 아들을 낳아 홀로 키우셨습니다. 그 동안 어떻게 사셨는지요? 지난 세월 시부모님과 부모님을 모시며 아들을 홀로 키웠습니다. 20년간 시부모님을 공양하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홀로 아들을 키우면서 한복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친정아버지가 몸이 안 좋아지면서 부모님을 20년간 모시게 됐습니다. 당연한 도리를 한 것뿐인데 면에서 효부상, 청주시에서 효부상을 받았습니다. 이순규 할머니는 6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편이 사용했던 요강, 바느질 그릇, 구두 등 결혼 폐물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내 인생이 고스란히 다 담겨있으니 버릴 수가 없었다’는 말 속에 그녀의 인생이 보인다. 남편을 보내고 아들을 홀로 키우면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다시 부모님 모신 것에는 후회가 없습니다. 오히려 아들이 빗나갈까봐 재가도 안 했습니다.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 듣게 하기 싫어서 장가가서도 종아리를 때렸습니다. 제대로 키우려고 엄하게 키워서 그런지 착하게 컸습니다. - 꿈같았던 2박 3일 일정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 인가요? 남편 얼굴이 변한 거요(웃음). 그래도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뻤습니다. 남편은 나를 빨리 알아보지 못 했습니다. 내가 먼저 알아봤고 남편은 계속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많이 변했다, 많이 변했다’고 했습니다. 65년 만에 재회라 얼굴이 많이 변하긴 했죠. - 상봉 일정의 마지막 순간 헤어지기 힘드셨을 텐데 어떤 심정이었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나요? 이야기를 많이 못 했습니다. 그냥 서로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라’고 했습니다. 어쨌든 생존해서 다시 만났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마지막 작별할 때 남편은 울었는데 나는 안 울었습니다. 남편이 계속 뒤돌아보는데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들이 ‘백 살 이상 살아있으면 통일되고 만날 수 있으니 건강하게만 살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나 혼자가 아닌 아들이 옆에 있으니 마음이 든든하다고 했습니다. 나도 그저 건강하게 살라고 했습니다. 보고 싶지만 만날 수가 없으니 아예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예 안 봤을 때는 생각도 못 했는데 한 번 보고나니 다시 보고 싶습니다. 눈물은 다 말랐습니다. 그래도 기쁨이 큽니다. 살아있다는 그 소식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홀로 아들을 키우고 시부보님 공양한 것에 대한 보상을 다 받은 것 같습니다. 남편이 재가하지 않고 홀로 아들을 키운 것에 많이 미안함을 느껴 내가 ‘벌금을 내라’고 농담을 건넸습니다.(웃음) - 남편과의 상봉 이후 생활에 달라진 점이 있나요? 생활은 똑같은데 머리나 마음은 ‘남편이 살아있구나’라고 자꾸 인식이 됩니다. 나보다 아들이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전에는 돌아가신 줄 알았기에 그리움조차 없었는데 이제는 아버지가 있다고 생각하니 생각날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들이 65년 동안 부를 수 없었던 ‘아버지’라는 이름을 불러 보고 얼굴도 쳐다볼 수 있어서 내 속이 다 시원했습니다. 그 나이 먹도록 아버지라는 소리도 못 불러보고 얼굴도 몰랐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남편이 살아 있으니 사망신고 했던 것을 바꾸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취소했다가 나중에 다시 사망 신고를 하려면 본인이 있어야 된다고 해서 통일이 되면 모를까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 그냥 서류상으로는 놔두기로 했습니다. 이순규 할머니가 남편이 선물한 스카프와 식탁보를 들고 19살 새색시처럼 환하게 웃고 있다. 가장 기뻤던 것은 남편이 죽은 줄 알았기 때문에 37년간 남편 제사를 지내왔는데 지난 추석부터 남편 제사를 안 지내게 돼서 식구들 모두 기분이 좋았습니다. - 아직도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상봉의 뜻을 이루지 못 하고 북쪽의 가족들을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분들에게 전해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적십자 총재님이 말하기를 ‘이산가족 수가 666만 명이여서 우리는 로또에 당첨된 거나 다름없다’고 했습니다. 특히 우리 가족은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을 다시 만난 거라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너무 기대를 하고 가지 말고 평범하게 가는 것이 좋습니다. 어쨌든 만나고 나면 더 슬퍼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단단하게 먹어야 합니다. 저야 살아생전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건강하게 사신다면 언젠가는 꼭 만나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자료제공 :(www.korea.kr))]
- 관리자
- 2015-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