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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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 ‘핫라인’ 개통…청와대-북한 국무위원회 연결
-남북정상 핫라인 20일 오후 4분 19초간 시험통화 -문 대통령·김정은 통화 시기·방식 최대 관심…내주초 직접 통화 예상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간의 직통전화선 핫라인이 20일 오후 개통됐다. 남북은 이날 핫라인 개설 이후 실무자간 시범통화도 마쳤고 청와대와 북한 국무위원회에 설치됐다. 청와대에는 문재인 대통령 집무실 책상 위에 놓였다. 남북 정상 간 ‘직통 전화’가 연결된 것은 처음이다. 남북은 판문점 연락채널과 군 통신선, 국가정보원·통일전선부(통전부) 라인을 가동한 데 이어 정상 채널까지 확보하면서 ...
- 관리자
- 2018-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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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상 핫라인 역사적 개통…4분 19초간 시험통화
청와대와 북한 국무위원회를 연결하는 남북 정상 간 ‘핫라인’이 남북정상회담을 1주일 앞둔 20일 설치가 완료됐다.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종합상황실장인 윤건영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은 이날 춘추관 브리핑에서 “역사적인 남북 정상 간 직통전화 연결이 완료돼 오늘 오후 3시 41분부터 4분 19초간 상호 통화로 이뤄졌다”고 말했다. 전화통화는 송인배 청와대 1부속비서관과 북한 국무위원회 담당자 간 이뤄졌다. 송 비서관이 북측으로 전화를 걸었고 북측 국무위원회 담당자가 전화를 받았다. 청와대. 윤 실장은 “전화 연결은 매끄러웠고 전화상태가 매우 좋았다”며 “마치 옆집에서 전화하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전했다. 또한 윤 실장은 “정상회담이 1주일 앞으로 다가온 만큼 남은 시간 동안 현장 점검에 최선을 다할 예정”이라며 “우선 내일 오후에 판문점 현장에서 경호안전 관계 기관 대책회의가 예정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주에는 마지막 준비위원회 회의 및 분과장회의를 포함해 판문점 현장 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라며 “오는 24일 판문점 종합상황실이 개소되면 판문점 상황실을 중심으로 차분하고 꼼꼼하게 준비상황을 점검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자료제공 :(www.korea.kr)]
- 관리자
- 2018-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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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외신들 판문점에 뜨거운 관심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내리쬐는 봄 햇살이 따사롭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지난 10년간 꽁꽁 얼어붙었던 남북관계가 개선되면서 남북정상회담까지 이어지는 등 올해 ‘한반도의 봄’은 특별하다. 외신기자들이 18일 이른 아침부터 판문점을 가기 위해 서울프레스센터 앞에 모여있다. 프레스 투어는 외신 116명, 내신 111명 등 총 227명이 참여해 오전과 오후 2회씩 총 4회로 진행됐다. ‘2018남북정상회담’을 9일 앞둔 18일 국내외 기자들이 판문점 취재를 위해 이른 아침부터 서울프레스센터 앞에 속속 모였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최초로 남측 지역인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려서일까.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가 마련한 이날 언론사 판문점 프레스투어에는 내신 111명, 외신 116명 등 총 227명이 참여해 열기가 뜨거웠다. 미국, 중국, 일본뿐만 아니라 독일, 영국, 러시아, 대만, 스페인 등의 기자들까지 나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투어는 하루에 내외신 함께 진행한 탓으로 각각 2조, 총 4조로 나눠 실시됐다. 외신기자와 함께 판문점을 둘러보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오전 7시 45분 미팅시간까지 30분도 더 남았는데 외신기자들은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버스에 올라타 대기했고, 출발 15분 전에는 버스 2대 중 1대는 이미 꽉 찬 상태였다. 외신기자들은 판문점으로 향하는 길에 조금이라도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각자가 원하는 자리에 앉으려고 출발 전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출발한 지 1시간이 지났을까, 아직 통일대교도 보이지 않았지만 외신기자들은 버스 맨 앞 혹은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분 뒤 통일대교가 보이자 ENG카메라와 망원렌즈가 장착된 카메라들이 앞다퉈가며 버스 맨 앞으로 가 촬영에 들어갔다. 이번에 만난 외신기자들은 판문점을 적게는 2번, 많게는 셀 수 없을 정도로 가봤지만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직전이라 한 컷이라도 더 건지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D-9 판문점, 그곳은 어떤 분위기일까? 버스 옆자리에 앉은 일본의 와다 타카시 TV도쿄 서울지국장은 지난해 오청성 귀순 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12월 프레스투어로 판문점을 방문한 적이 있다. 와다 타카시 국장은 “당시 판문점에 갔을 때는 사건이 일어난 직후라 긴장 상태였지만 북한 병사가 한 명밖에 없어 의아했습니다. 오늘은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직전이라 어떤 분위기일지 궁금하네요”라고 말했다. 일본의 와다 타카시 TV도쿄 서울지국장(오른쪽)과 변찬식 TV도쿄 기자가 브리핑이 열렸던 JSA안보견학관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판문점에 도착하자마자 외신기자들은 JSA경비대대와 UN군 사령부 공보팀의 인솔하에 JSA안보견학관에서 6·25전쟁과 국내 정세, 안보 관련 브리핑을 받았다. 하지만 모두의 관심은 다음 코스인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나 악수할 자유의 집 앞 군사분계선(MDL) 지역과 회담이 열릴 평화의 집이었다. 특히 이날은 북측지역인 통일각에서 남북한 2차 실무회담이 열리고 있어 공동경비구역의 모습이 더 궁금했다. 안보견학관에서의 브리핑이 끝나기가 무섭게 외신기자들은 다시 분주히 버스에 탑승했고 드디어 군사분계선 바로 앞에 있는 자유의 집 도착했다. 과연 어떤 분위기인지 궁금한 기자들은 건물 내에서 경비대대의 안내에 따라 대기하고 있는 몇 분이 길게 느껴질 정도였다. 판문점 ‘자유의 집’ 앞 군사분계선 근처에서 외신기자들이 앞다퉈 촬영하고 있다. 평소보다 많은 경비대대와 UN군 사령부의 경호 때문일까, 아니면 역사적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서일까, 떨리는 마음으로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곳은 숨소리 하나 안 들릴 정도로 고요했고 봄 햇살과 함께 평화로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판문점의 고요함은 외신들의 연사 소리와 리포팅 소리로 금세 깨졌다. 외신기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사진 촬영이 허용된 노란색 경계선 바로 앞 또는 MDL상에 있는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실(T2) 안쪽에 자체 포토라인을 순식간에 만들었다. 취재 열기가 뜨겁다 못해 일부 경비대원과 기자 그리고 기자와 기자 사이에는 포토라인을 두고 약간의 실랑이도 있었다.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 마지막 기회이다 보니 1분 1초가 아까웠고 1cm라도 더 앞에서 찍으려 했다.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실(T2) 안쪽에 촬영하고 있는 외신 기자들. 북한 병사들은 북측 관광객이 없어서인지 MDL 가까이에는 없었지만, 자유의 집을 마주하고 있는 판문각 앞에 몇 명 모습을 보였다. 한 외신기자는 북한 병사가 초소에서 커튼을 열고 쳐다보는 것을 봤다고 전했다. 하라다 켄이치 지지통신 기자는 “두달 전에 판문점에 왔을 때는 북한 병사를 보지 못했는데 오늘은 볼 수 있어 신기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판문점 남측 지역과 북측 지역을 모두 다녀온 러시아 이타르타스 통신의 스탄니슬라브 와리워다 기자. 외신기자들에게 북측 판문점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러시아 이타르타스 통신의 스탄니슬라브 와리워다 기자와 스페인의 안드레스 산체스 브라운 EFE통신 기자는 판문점 남측 지역과 북측 지역을 모두 가봤다. 스탄니슬라브 기자는 “북측 JSA는 남측과 대체로 비슷하지만 좀 더 긴장감이 돌았습니다. 남측에서는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는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고 말했다. 안드레스 기자는 “지난해 북측 지역에 갔을 때는 판문각 2층에서 남쪽을 향해 사진을 찍었고 김일성기념비가 있는 곳을 둘러 봤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두 기자는 여러 번 판문점을 왔지만, 분단을 상징하는 특별한 곳이라 올 때마다 남다른 느낌을 받았다. 스탄니슬라브 기자는 “특히 남북이 선 하나를 가운데 두고 대면하고 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습니다”라고 말했다. 2018남북정상회담이 열릴 ‘평화의 집’은 지금 오는 27일 2018남북정상회담이 열릴 장소인 ‘평화의 집’. 외신기자들은 정상회담을 앞두고 촬영하는 만큼 작은 것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외신기자들에게 이번 프레스 투어가 특별했던 것은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평화의 집’을 둘러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여러 번 판문점을 온 외신기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부분이었다. 김도균 영국 로이터 통신 기자는 입사한 지 올해로 24년 차다. 김 기자는 “평균 한 달에 한 번꼴로 판문점에 왔지만, 그전까지 평화의 집은 버스 안에서만 보거나 촬영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3초소와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가지 못해 아쉽지만, 정상회담이 열리는 평화의 집을 직전에 촬영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또 보수공사를 통해 건물이 깨끗해졌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김 기자의 말처럼 평화의 집 주변 공동경비구역은 건물 보수 공사와 동선 체크를 하는 등 정상회담 준비가 한창이었다. 건물 1층 입구는 공사 중인지 비닐로 씌워져 있었고, 외신기자들이 도착했을 때는 대회의실이 있는 3층 외부에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가 촬영을 할 때는 사라졌다. 또 건물 앞부터 자유의 집 가는 길 쪽 바닥에는 테이프 같은 줄이 길게 놓여 있었다. 건물 외관만 보는 거라 외신들이 실망할 줄 알았는데, 평화의 집 자체만으로 상징하는 바가 커서인지 반응은 예상외였다. 변찬식 TV도쿄 기자는 “이번 정부 들어서는 취재진을 위한 배려가 상당합니다. 문재인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만큼 외신들이 취재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을 보고 매체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라면서 특히 “평화의 집을 정상회담 직전에 촬영해 현장의 느낌을 잘 살릴 수 있게 됐네요”라며 만족해했다. 평화 한반도, 남북이 자유롭게 왕래한다면 몇몇 외신들은 이날 인터뷰를 응하는 것에 상당히 조심스러운 눈치였다.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한 개인의 이야기가 국가의 입장으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남북정상회담이 단순히 남의 나라 일이 아니기 때문인 듯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길 바라는 마음에 어렵게 말을 꺼냈다. 진 진저 중국 모 매체 기자는 “한반도의 정세가 안정되어야 중국의 국익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이웃나라에서 전쟁이 나는 것은 반대하기 때문에 남북이 화해 모드로 가는 것은 중국에서도 환영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 남북총리회담 등 남북회담이 열렸을 때 취재차 판문점에 온 적이 있다. 진 기자는 “노무현 대통령 정부 시절 남북의 관계가 좋았습니다. 남과 북이 한 집안 같은 분위기여서 회담뿐만 아니라 대성동 마을, 개성공단 등을 찾아 남북이 협력하는 모습을 전 세계에 보도하면서 외국인이 입장에서도 보기 좋았죠”라고 설명했다. 또 그는 “그때 비해 이번 정상회담이 더 치밀하게 준비하고 소통도 많이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라며 일회성의 보여주기식이 아닌 앞으로 지속적인 교류가 있을 것을 기대했다. 채승훈 미국 ABC뉴스 기자(왼쪽)와 김도균 로이터통신 기자. 김도균 로이터통신 기자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절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을 취재했다. 김 기자는 “그때도 남북관계가 좋은 편이었지만, 지금 북한의 태도와 분위기는 그때와 많이 다릅니다. 저뿐만 아니라 외신기자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라며 북한의 적극적인 태도에 약간 당황(?)스럽다는 반응이다. 그는 “로이터에서도 긍정적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외신에서 일하고 있지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정상회담이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외신 기자들이 현장에서 긍정적인 분위기를 몸소 느끼면서 앞으로 좋은 관계로 발전하지 않을까 내심 기대합니다”라고 말했다. 파비앙 크레츠머 독일 기자가 베를린 장벽을 떠올리며 독일 통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분단과 통일을 경험했던 독일의 공영방송인 도이치벨레의 파비앙 크레츠머 기자는 한반도 분단이 남의 일 같지 않다. 판문점이 한반도의 분단을 상징한다면, 독일에도 분단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베를린 장벽’이 있다. 파비앙 기자는 베를린 장벽이 ‘독일 통일’의 상징적 기념물이 됐듯이 판문점에도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이번 프레스투어에 참여했다. 그는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의견을 묻는 말에 과거 동서독 정상의 만남을 떠올렸다. “과거 동서독의 관계와 현재 남북한의 관계는 조금 다릅니다. 당시 동서독은 비록 분단돼 있었지만 경제적 협력을 비롯해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졌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1970년에 개최된 제1차 정상 회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에도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 간의 소통이 활발해졌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외신들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운영방식이 세련돼졌다고 평가했다. 출범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평창동계올림픽을 시작으로 북한과 사전에 소통을 많이 한 결과 남한에서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열리게 됐다고 평가했다. 또 앞으로 남북간 적극적인 상호 교류가 많아지면 한반도는 물론 주변국의 평화와 안정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스페인의 안드레스 산체스 브라운 EFE통신 기자는 도라산 남북출입국사무소 앞에서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기대감을 드러냈다. 이미 평양과 개성, 마식령을 다녀온 스페인의 안드레스 산체스 브라운 EFE통신 기자는 남북의 지속적인 교류가 자리 잡기를 바라면서 “왕래가 가능해진다면 북한의 서해위성발사장이 있는 동창리에 가서 광명성호가 발사된 로켓발사장을 가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또 ”평양냉면은 먹어봤지만, 큰 경기장이 있었는데 스포츠 경기를 보지 못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스포츠 경기를 보고 싶습니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와다 타카시 TV도쿄 서울지국장은 기자로서 사명감을 보였다. 그는 “북한 정부가 아닌 사람들을 취재하고 싶습니다. 북한의 장마당(시장) 같은 곳에 가서 그들의 삶을 더 가까이서 담고 싶고 개인적으로는 대동강 맥주를 마시고 싶습니다(하하)”라고 말했다. 북한과 붙어 있는 중국이 고향인 진 진저 기자는 자가용을 타고 서울에서 북한을 거쳐 중국에 가는 모습을 이야기했다. 그는 “아마 하루도 안 걸릴 것 같습니다”라며 “중국의 ‘일대일로(육상·해상 실크로드)’ 사업과 연결된다면 물류 산업 역시 긍정적인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기대감을 보였다. 오는 27일 전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한반도 평화의 새로운 여정이 시작된다. 미국의 채승훈 ABC뉴스 기자는 “비록 아직은 긴장과 분단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판문점이지만, 이번에 열리는 남북정상회담이 평화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돼 평화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곳으로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면서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 아이들이 남북한의 군사적 대립과 제재 없는 안전한 나라에서 자랐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자료제공 :(www.korea.kr)]
- 관리자
- 2018-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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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실향민의 포기할 수 없는 희망
“함경도 우리 고향 앞 바닷가로 나가는 길에 옹달샘이 하나 있습니다. 옹달샘 물 한 잔 떠서 시원하게 목을 축였던 기억이 나요. 고향 옹달샘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요. 그 옹달샘을 기억하는 사람도 아마 우리가 마지막이겠지요.” 아흔의 노구를 이끌고 기자와 마주 앉은 실향민 김송순 할머니가 68년 전 6·25전쟁 중 떠나온 휴전선 넘어 함경도 고향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4월 27일 열리는 2018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6·25전쟁 당시 고향인 북한 지역을 떠나 대한민국으로 내려온 실향민들을 만났다. “10년 전 동생 살아 있다는 소식 듣고 꿈만 같았어요” 김송순 할머니.(사진=C영상미디어) 김송순 할머니는 1950년 홀로 고향 함경남도 북청을 떠나왔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 모두 고향에 남겨둔 채 홀로 남한으로 내려온 지 68년이 흘렀지만 김 할머니는 고향을 떠나던 당시를 생생히 기억했다. 그는 “너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한다”며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그래도 그는 다른 실향민과 이산가족이 겪고 있는 애절함보다는 나은 형편이라고 했다. 10여 년 전 친동생이 북한 고향에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이지만 동생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안부를 확인할 수 있기에 가슴 한곳을 억누르던 응어리가 조금은 풀렸다고 했다. 그럼에도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김 할머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고, 형제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동안 알지도 못했다”며 “이들이 보냈을 힘든 세월을 생각하면 늘 눈물부터 난다”고 했다. 김 할머니는 10년 전 처음 고향에 동생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며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기가 막혔지요. 동생이 보내준 편지를 보는데 손이 떨리고 눈물이 계속 흘렀어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동생이 보낸 편지로 처음 알게 됐는데 제 마음이 어땠겠어요. 형제들도 다 세상을 등지고 동생 한 명 살아서 가족이며 고향 이야기를 그렇게 편지에 적어 보내준 거예요. 그 편지를 잡고 있는 손이 너무 떨려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김 할머니는 곧 2018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을 신문과 뉴스를 통해 알고 있다. 기대와 바람, 그리고 걱정과 아쉬움을 동시에 갖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후 혹시라도 ‘북한에 남겨진 가족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과 기대가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만남이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게 되면 수많은 실향민과 이산가족들에게 또 다른 아쉬움과 아픔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이 앞서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제 나이 이제 90입니다. 68년 전 헤어진 동생과 하룻밤만이라도 얼굴 맞대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70년 가까운 시간 떨어져 생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가족이 만나는 자리에서 누군가의 눈치를 봐야 하고, 경계해야 하고, 묻고 싶은 말과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나눌 수 없다면 68년 만의 만남이 더 큰 아픔으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김 할머니는 실향민, 이산가족의 아픔을 생각하는 결정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가족 생사조차 모른 지 68년째예요” 최영선 할아버지.(사진=C영상미디어) 최영선 할아버지 역시 함경남도 북청이 고향이다. 6·25전쟁 당시 홀로 남한으로 내려왔다. 최 할아버지는 북한에 남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나 크다. 7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북한에 남은 가족과 친척들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다. 최 할아버지는 단 한 명의 생사라도 알 방도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최 할아버지도 북한에 남은 가족의 생사를 확인해보기 위해 오랜 세월 노력했다. 최 할아버지는 “피난해 남한으로 내려온 후 고향에 살던 가족이 어느 순간 완전히 흩어져버린 것 같다”며 “여러 사람에게 부탁해 가족의 행방을 수소문해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가족과 친척들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를 기자에게 설명하는 최 할아버지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아쉬움과 그리움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최 할아버지는 “지금은 북한에 남겨진 가족들 찾는 일을 멈춘 상태”라며 “아쉽다”고 말했다. 최영선 할아버지는 “68년을 떨어져 살았는데 손 한 번 잡아보고, 얼굴 한 번 맞대고 문질러보고 싶은 게 당연한 심정일 것”이라며 “그런데 여전히 가족이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이산가족과 실향민이 많은 게 사실”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최 할아버지는 68년 전 헤어져 북한에 남겨진 누이동생을 한국에 있는 자신의 호적에 올려놓았다. 살아 있을 것이고, 언젠가는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기 위해서다. 최 할아버지는 “북한에 있는 가족의 생사를 북한 측이 확인해주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며 “우리 정부와 북한 측이 이산가족의 생사 확인만이라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또한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정부가 이제는 고령이 된 이산가족과 실향민의 바람을 귀담아들어주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북한 사는 누이 편지에 온종일 울었어요” 김경재 할아버지.(사진=C영상미디어) 김경재 할아버지도 6·25전쟁 중이던 1950년 함경남도 북청을 떠났다. 하지만 부모님과 형제 등 가족과 친척 절반 이상이 고향 북청에 그대로 남겨졌다. 68년이 지났지만 단 한 번도 북한에 남겨진 부모님과 형제, 친척들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김 할아버지는 “가족들의 생사조차 모른 채 속만 태우며 수십 년을 살고 있는 다른 실향민과 이산가족에 비하면 나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했다. 김 할아버지 역시 북한에 두고 온 누이동생과 사촌이 고향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동생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고,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1950년 겨울 피난길에 올라 남한으로 내려온 후 수십 년 동안 북한에 남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그러던 1990년대 중반 누이동생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김 할아버지는 “북한이 잠깐이었지만 미국에 살고 있는 북한 출신 사람들의 고향 방문을 허용한 적이 있었다”며 “이때 미국에 살던 고향 선배 한 명이 북한을 방문해 누이동생과 사촌이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고 알려줬다”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지인이 가져다준 누이동생의 사진 한 장을 보는 순간 몇 번 기절했을 만큼 울었다. 더구나 사진 속 누이동생이 자신이 북한을 떠날 때까지 살던 고향집에 그대로 살고 있는 것을 보며 가슴이 더욱 메어왔다. 김 할아버지는 “동생이 68년 전 살던 옛날 집 대문 앞에 서서 찍은 사진을 보며 꿈인 것 같았다”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셨는지도 처음 알게 됐다”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북한에 동생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 북한에 있는 동생에게 편지라도 보내기 위해 거주지를 일본으로 옮겨 생활하기도 했다. 또 동생 소식을 듣기 위해 중국을 찾기도 했다. 혹시라도 기회가 찾아올 수 있을까 싶어 이산가족 상봉 이벤트에도 신청을 했다. 하지만 김 할아버지에게 동생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지금껏 찾아오지 않았다. 그저 아주 가끔 손에 넣을 수 있는 동생 편지를 보며 그리움을 달래고 있다. 김 할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10대 중반 정도의 나이는 돼야 북한에 두고 온 가족과 고향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라며 “북한에 두고 온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마도 여든 살에서 아흔 살이 넘은 우리 세대가 마지막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고령인 실향민 수가 점점 줄어들면서, 이제는 북한에 있는 가족과 친지를 만나고 싶다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그래도 죽기 전에 고향에 한 번 가봤으면, 그리운 가족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직접 볼 수 있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며 “그 꿈이 현실이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 할아버지도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이산가족과 실향민을 위한 논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하지만 그런 논의가 이산가족과 실향민의 기대와 희망을 충족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이야기도 했다. 김 할아버지는 “예전부터 반복돼왔던 것처럼 매우 적은 수로 제한된 이산가족 대상으로 북한의 가족을 만나게 해주는 정도를 넘어서는 논의가 됐으면 좋겠다”며 “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리워하던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보장해줘야 한다”고 했다. [위클리공감][자료제공 :(www.korea.kr)]
- 관리자
- 2018-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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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 휴전 협상 당시 판문점 사진 공개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협정 조인식 모습. 왼쪽 책상에 앉은 사람이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William K. Harrison Jr.) 중장이고 오른쪽 책상에 앉은 사람이 공산군 수석대표 남일 대장이다. 1953년 7월 27일 미군이 촬영한 사진으로, 국사편찬위원회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했다. (사진 = 국사편찬위원회) 오는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개최되는 남북정상회담을 맞아 한국전쟁 당시 판문점의 모습과 판문점에서 이뤄진 휴전협정 과정을 담은 사진들을 국사편찬위원회가 19일 공개했다. 이날 공개한 사진은 국사편찬위원회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으로,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촬영한 것이다. ‘평화, 새로운 시작’라는 표어와 함께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판문점은 한국전쟁이 마무리된 장소이자 분단체제가 시작된 장소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조용한 농촌마을 널문리에 휴전회담장이 설치되고 오랜 협상을 거쳐 휴전협정이 조인되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담겨 있다. 1953년 6월 대표단을 찍는 왼쪽의 기자는 ‘텔레뉴스(Telenews)’ 소속 웨이드 빙햄(Wade Bingham)이고 오른쪽의 군인은 유엔군 대표단의 일원이었던 미 육군의 랠프 오스본(Ralph M. Osborne) 준장이다. 웨이드 빙햄이 촬영한 당시 영상과 사진은 미국 CBS를 통해 방영됐다. (사진 = 국사편찬위원회) 휴전회담은 1951년 7월10일 시작된 후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으로 끝났다. 지금의 판문점은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조인된 후 새로 조성된 곳으로 판문점 내 건물도 모두 협정 조인 후 새로 지어졌다. 첫 회담은 개성에서 열렸지만 개성 일대가 공산군의 통제 아래 있었기 때문에 회담 장소로는 적절치 않았다. 이에 따라 회담 장소를 옮겨 1951년 10월 25일 널문리의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재개됐다. ‘공동경비구역(JSA)’이라고도 불리는 판문점의 공식 명칭은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다. 지금의 판문점은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맺어진 후 새롭게 조성된 곳이다. 판문점 내 건물도 모두 협정 후 새로 지어졌다. 휴전회담 장소인 판문점은 중립지대였기 때문에 모든 전투행위가 금지됐다. 중립지대임을 알리기 위해 눈에 잘 띄는 열기구를 띄워 미연의 사고를 방지하고자 했다. 1951년 11월 16일 미군이 촬영한 사진으로, 국사편찬위원회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했다. (사진 = 국사편찬위원회) 휴전회담의 현장이었던 사진 속 건물들은 지금의 판문점에서 북쪽으로 약 1km 정도 떨어져 있다. 조인식장 건물은 현재 북한이 전시시설로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편이 소장한 사진자료들은 국편 전자사료관 누리집(http://archive.history.go.kr)에서 ‘판문점’ 등의 검색어를 통해 열람할 수 있다. 한편 국편이 수집한 사진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수집 사진자료로 간행되고 있다.[자료제공 :(www.korea.kr)]
- 관리자
- 2018-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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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분단의 상징→평화의 상징 ‘역사적 변신’ 기대감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판문점. 정상회담을 앞두고 판문점이 세계인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개최지이자 북한 최고지도자의 첫 남측 방문지로 선정된 만큼 이제는 판문점이 ‘평화의 상징’으로 변모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경기일보는 19일 이번 남북회담이 열리는 판문점을 직접 찾아 휴전협정부터 곧 있을 정상회담까지, 판문점은 남북의 굴곡진 역사를 담았다. 공식적으로는 남과 북, 그 어느 쪽에도 속해있지 않은 지역인 판문점.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이곳에서 맺어지면서 판문점은 전 세계에 ‘한반도 ...
- 관리자
- 2018-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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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 핫라인 20일 개통…청와대-北국무위 연결
남북 정상 간 ‘핫라인’이 20일 개통된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19일 청와대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준비위원회의 6차 전체회의 결과 브리핑을 통해 “내일 남북 정상간 핫라인이 연결되며, 실무자끼리의 시험 통화가 우선 이뤄진다”고 밝혔다. 김 대변인은 “양쪽 전화 연결선의 끝이 우리 쪽은 청와대고, 북쪽은 국무위원회”라며 “정상 간 통화가 언제 이뤄질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 김 대변인은 이어 “남북정상회담의 문재인 대통령 공식 수행원으로 6명을 결정했다”며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서훈 국가정보원장, 조명균 통일부 장관, 송영무 국방부 장관,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실제로 남북정상회담에서 테이블에 누가 앉을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며 “북쪽에서 누가 몇 명이 앉을지에 따라서 남쪽도 거기에 맞출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김 대변인은 “정상회담에 앞서서 준비위원회 차원에서 두 번의 리허설을 한다”며 “24일 오후에는 분과장단 전원이 참여해 행사 당일 전체 일정을 그대로 재현하고, 26일에는 준비위 인원을 조금 더 넓혀 공식적으로 세밀하게 리허설을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쪽의 선발대도 24일 또는 25일 남쪽으로 내려와서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리허설을 준비한다”고 전했다. 정상회담 상황실도 오는 24일 판문점 남측 지역 자유의 집 3층에 개소한다. 김 대변인은 “상황실은 당일 행사 상황 관리를 위해서 마련되며, 청와대와 부처의 행정관급으로 구성이 될 예정”이라며 “일산 킨텍스 제1 전시관 2층에도 24일부터 상황실을 연다”고 밝혔다. [자료제공 :(www.korea.kr)]
- 관리자
- 2018-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