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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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니·D램반도체·나로호…광복70년 과학기술 70선
공병우 타자기에서 첫 고유모델차 포니, D램 반도체, 나로호까지… 광복 이후 국민생활을 변화시킨 우리나라의 대표 과학기술은 어떤 것이 있을까! 미래창조과학부는 광복 70년을 맞이해 광복 이후 국가 경제발전을 이끌어온 과학기술의 역할을 조명하기 위해 ‘광복 70년 대표성과 70선’을 발표했다. 대표성과 70선은 광복7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기념사업으로 선정된 7월 28일부터 8월2일까지 고양시 킨텐스에서 개최되는 ‘과학창조한국대전’에 전시될 예정이다. 미래부는 과학기술의 역할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와 관심도 제고를 위해 대표성과 70선에 대한 온라인 국민선호도조사(6.24~7.17)를 실시한다. 선호도조사는 전용 홈페이지(http://best70.ntis.go.kr)를 통한 온라인 투표 방식으로 진행되며 국민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다. 선호도 조사 결과, 70선 중 국민적 관심도가 높은 성과는 기념행사에서 특별전시해 그 중요성과 의의를 조명할 계획이다. 한편, 70선은 지난 70년 간의 성과 중 국가 경제발전 기여도가 큰 과학기술 성과를 중점으로 선정됐으며, 개인적으로 우수한 업적을 이룬 과학자들의 연구성과(70선 중 5개)도 포함됐다. 리-아이링이론(화학, 이태규), 산림녹화 임목육종(현신규), 리군이론(수학, 이임학), 게이지이론의 재규격화(물리학, 이휘소), 한탄바이러스백신(이호왕) 등이 그것이다. 이번 70선에 대한 시대별 선정결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광복 후 40~50년대는 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지원을 통한 성과보다는 기관이나 개인 차원의 연구 성과가 나타나는 시기로, 황폐한 민둥산을 푸르게 만드는데 기여한 현신규 박사의 ‘산림녹화 임목육종’, 한글 기계화의 효시‘기계식 한글타자기(공병우 타자기)’등 5개의 성과가 선정됐다. 60년대는 과학기술전담부처와 과학기술연구기관이 설립되고, 정부 주도로 농업과 초기 공업화 진흥정책이 추진된 시기로, 채소 종자의 자급기반을 마련한 ‘우장춘 박사의 일대잡종 배추 품종’, 화학장치산업 발전의 모태가 된 ‘화학비료 생산기술’, 섬유업계의 혁신을 부른 ‘나일론 생산기술’ 등 8개 성과가 선정됐다. 70년대는 조국근대화 경제개발 정책과 함께 자동차ㆍ조선, 토목건설 등 중화학공업 육성이 본격화된 시기로, 국내 최초의 고유모델 국산차(포니)’, ‘초대형 유조선’, ‘경부고속도로’, 주곡자립 달성으로 식량부족 문제를 해결한 ‘통일벼’ 기술 등 9개 성과가 선정됐다. 80년대는 정부의 기술드라이브 정책과 함께 연구개발 지원 규모가 대폭 확대되고 민간의 개발 활동도 활발해지는 시기로, ‘디램(DRAM) 메모리 반도체’, ‘국산전전자교환기(TDX) 상용화’, 감염병 예방의 효시 ‘한탄바이러스백신’ 등 17개의 성과가 선정됐다. 90년대는 탈추격형 기술혁신 논의가 활발해지고 신산업 창출을 위한 통신, 생명공학 기술과 우주ㆍ원자력 등 거대과학기술 개발 노력이 본격화된 시기로, ‘코드분할다중접속(CDMA)기술 상용화’, ‘라이신/핵산 발효기술’, ‘우리별 인공위성’, ‘한국형 표준원전(KSNP)’ 등 10개 성과가 선정됐다. 이어 2000~2010년대는 글로벌 기술경쟁력 확보를 위한 연구개발 투자가 지속적으로 늘고 정보통신기술(ICT)ㆍ바이오기술(BT)ㆍ나노기술(NT) 등의 신기술과 다양한 형태의 융ㆍ복합 기술 개발이 가속화된 시기로, ‘인간형 휴머노이드(휴보)’, ‘초음속 고등훈련기(T-50)’, ‘글로벌신약(팩티브)’, ‘나로호’, ‘대한민국표준시(KRISS-1) 제정’ 등 21개 성과가 선정됐다. 이장무 대표성과선정위원장은 “6.25 전쟁 직후 1인당 국민생산 66달러의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이 세계 13위권 경제대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과학기술”이라며, “이번 대표성과 70선 선정을 계기로 과학기술과 과학기술인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커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자료제공 :(www.korea.kr))]
- 관리자
- 2015-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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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첫 전투함 백두산함, 동해 바다 수호신이었지”
태극기 걸린 집을 찾으라 했다. “우리 집은 일 년 열두 달 태극기를 걸어.” 국경일이 아닌 6월 15일.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마두동의 한 아파트 21층 베란다 창밖에 걸린 태극기는 붉고 푸른 태극이 선명했다. 최영섭(87) 한국해양소년단연맹 고문(예비역 대령) 댁을 그렇게 찾았다. 6ㆍ25전쟁 당시 최 고문은 갓 독립을 이뤄 제대로 된 전투함 한 척 없던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해군 장병들이 십시일반 모은 월급과 해군 부인들이 바자회, 삯바느질로 더한 돈으로 구입한 백두산함의 갑판사관 겸 항해사, 포술사였다. 백두산함으로 치른 6ㆍ25전쟁 첫 해전이자 국운을 가른 전승으로 기록된 대한해협해전의 산증인이다. 그는 정전협정 60년을 맞이한 2013년 바다에서 함께 생사를 같이하며 싸웠던 전우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이란 제목의 회상록을 펴냈다. 이 회상록 표지엔 작은 글씨로 ‘해군소위 최영섭 지음’이라고 적혀 있다. 전후 백두산함 함장, 충무함 함장, 제51전대 사령관까지 지내고 예편했고,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지금도 그의 가슴속은 포연이 번지던 조국의 푸른 바다를 지키던 붉은 심장의 최 소위 그대로인 듯했다. “우리 수군이 대견하군. 믿음직해.” 백두산함에 탑승한 이승만 대통령이 병사들 어깨를 두드리며 수군(水軍)이라고 했어. 그때가 1950년 6월 12일이야. 이 대통령이 해군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으로 산 백두산함을 직접 보기 원해서 진해에서 이 대통령을 모시고 부산까지 갔어. 가덕도를 돌아 부산으로 향할 때 대통령 모시고 3인치 주포의 사격훈련을 했어. 모의탄이지. 나라가 가난해 공무원 월급도 제대로 못 주던 시절이니까. 국가 재정으로는 군함 구입을 엄두도 못 낼 형편인 시절이라 해군이 자체적으로 군함을 구입하자고 월급에서 5~10% 갹출을 했어. 그때 내 월급이 1만 원인데, 두 달을 그리 냈지. 해군부인회에서는 뜨개질을 한 수예품을 모아 팔고 삯바느질에 의복 세탁까지 해가며 돈을 보탰어. 석 달 만에 모인 1만5000달러를 들고 손원일 제독(초대 해군참모총장)이 이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어. “우리에게 대포 달린 군함이 있어야겠는데,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돈을 좀 모았습니다.” 이 대통령이 “손 제독을 대할 면목이 없구만” 하며 4만5000달러를 보태줬지. 그래서 백두산함을 먼저 1만8000달러에 구입하고, 나머지 돈이 오는 대로 3척을 더 샀어. 美 연습선에 무기 장착, 한국군 첫 전투함으로 백두산함 PC-701은 미국 해군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건조한 PC형(구잠함 : 적의 잠수함 정찰이 주 임무였던 군함) 361척 중 하나였어. 1944년 취역했다 전쟁이 끝나면서 퇴역해 무기 다 떼어내고 뉴욕주에서 해양대학교 실습선으로 쓰이던 배야. 우리가 먼저 배 이름을 백두산함이라고 정해두었는데, 알고 보니 그 학교에서 실습선에 붙인 이름이 ‘화이트헤드 소위(Ensign Whitehead)’야.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사망한 졸업생을 기념해 붙인 것인데, 기이하게 백두산함과 영어의 뜻이 일치하는 인연을 가진 거야. 미국 호놀룰루항에서 백두산함에 무기를 장착하는 모습. 미국 해군역사센터 소장 사진이다.(사진=미국 해군역사센터) 이 배를 구입한 게 1949년 10월 17일인데, 미 해군과 무기 장착에 대한 약속까지 마친 상황에서 미국 정부에서 의회 승인을 받는 데 석달이 걸렸어. 그래서 그해 12월 26일 뉴욕 맨해튼 섬 부두에서 태극기를 올리고 하와이로 향했지. 호놀룰루항에서 1950년 3월 16일 3인치 포를 장착하고 딱 사흘 연습한 뒤 출발했지. 그리고 괌에 들러 포탄 100발을 사서 싣고 진해항에 들어온 게 그해 4월 10일이야. 진해항에서 한 달 동안 시뻘겋게 녹슨 선체를 닦았지. 다시 칠을해 단장하고 나니 대통령뿐만 아니라 각지의 해군 장병들이 백두산함을 보고 싶어 했어. 자신들이 갹출한 돈으로 구매한 대포 달린 군함을 직접 보고 싶었던 게지. 부산, 묵호, 인천, 군산, 목포에 있는 해군 경비부를 순회해 다시 진해에 돌아온 게 6월 24일 밤 11시 30분이야. 일요일인 다음 날 아침 7시에 일어나 묵은 빨래를 하고 나니 오전 10시 출동명령이 떨어졌어. 동해안에 인민군 군대가 침공해 상륙 중이었어. 연료, 물, 식량을 싣고 오후 3시 최용남 함장 지휘 아래 갑판의 항해 당직사관을 맡아 진해항을 출항했지. 강원도 해안으로 향해 부산을 지나 울산 앞바다에서 북상 중이던 이날 오후 8시 10분경 우현견시 조병호의 목소리가 울렸어. “우현 45도, 수평선 검은 연기 보임.” 쌍안경으로 수평선을 보니 검은 연기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고 있었는데 남진 중이란 뜻이지. 가까이 다가가 저녁 9시 반경 시커멓게 칠한 괴선박을 확인했어. “적이다.” 본능적으로 느껴졌어. 백두산함의 두 배는 됐지. 백두산함이 접근하니 이리저리 침로를 바꾸며 계속 남하하는데, 선박의 어디에도 선명도 안 보이고 국기도 달지 않았어. 국제 공통 통신신호에도 응답을 안 했지. 해는 졌지만 하지(夏至) 때라 희미하게나마 괴선박에 탑재된 무기들과 탑승자들이 보였어. 생각했지. ‘어둠 속에서 이마와 코가 허옇게 빛나면 로스케(러시아인)다. 그런데 빛나지 않으니 로스케는 아니고, 일본은 패망해 해군이 없고, 중공군은 장제스랑 싸우기 바쁘니 저 배는 분명 인민군 배다.’ 싸우자! 싸우자!냉수 건배 후 두려움 없는 전투 괴선박이랑 추격전을 벌인 끝에 백두산함에서는 공격하기로 결단을 내렸어. 당시엔 상대 국적도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대포와 기관포로 중무장한 선박엔 완전무장한 군인 600여 명이 탑승해 남진중이었던 거야. 그날 새벽에 동해안 여러 곳으로 인민군이 상륙했고, 이 괴선박은 계속해서 부산 지역에 상륙해 전선을 이뤄 우리 전 력을 분산시키려는 목적이 분명했지. 해군본부에서도 격침 명령이 떨어졌어. 26일 0시 10분경. 싸우게 되면 생사의 갈림길은 종이 한 장이야. 격침 명령 30분 전에 백두산함 장교 8명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최용남 함장이 이러더군. “귀관들이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과 같이 우리가 추격해온 괴선박은 공산당 군함이 틀림없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 그리고 덧붙였어. “전투에 돌입하면 이게 마지막 만남일 수 있다.” 그냥 ‘잘싸우자’ 이러자니 심심하잖아. 그래서 당번병에게 물 떠오라 해서 컵에 따라 냉수 건배를 했지. “싸우자! 싸우자!” 난 그리고 포갑부(함정의 무기 담당 부서)로 가서 부하들에게 내복을 갈아입으라 했어. 죽은 시신에서 냄새 면 안 되겠다 생각했지. 2013년 6월 26일 열린 대한해협해전 전승 기념식. 부산 해군작전사령부 앞바다에서 대한해협해전에 참가했던 용사와 유가족 등 3000여 명이 독도함에 탑승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사진=동아DB) 두려웠냐고? 전혀 두렵지 않았어. 우리에게 지킬 나라가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잘 알았거든. 나는 열세 살 때 부모님 따라 일본에 가 도쿄에서 공부를 해서 육체적 핍박은 받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는 핍박을 많이 받았지. 한국에 살던 사람은 더했어. 초등학교 때부터 일본화 교육이 무지 많아서 아침에 학교 가면 일본 황궁 과 일본 국기를 향해 황국 국민의 선서를 하고 아주 요란했다구. 오히려 일본에 가보니 일본화 교육은 없었고 우리 역사에 대한 책도 오히려 일본 도서관에 많았어. 게다가 백두산함은 대한민국 해군의 첫 전투함이야. 우리 손으로 마련했어. 백두산함 하사관과 병 모두 가장 우수한 인재들을 골라 태웠어. 그러니 해군 유일의 전투함에 승선했다는 자부심들이 대단했지. 백두산함 장병들 중에는 이북 출신들이 많았어. 나도 도쿄에서 5년을 살다 광복을 맞아 귀국해 북한으로 갔는데, 이북의 실정을 겪고는 온 가족이 남한으로 내려왔지. 해군사관학교 내 동기생이자 백두산함에도 같이 탄 김종식이도 평양 출신이고. 우리는 이북을 알았거든. 이북 내에서 벌어진 만행들, 남한 점령의 야욕을 직접 보았기에 언젠가 전쟁이 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최영섭 고문의 가슴에 달린 훈장들. 그의 가슴속엔 국가 혼이라는 더 빛나는 훈장이 간직되어 있다. 포탄 30여 발 발사… 적선 함교와 마스트 제압 전투 명령이 떨어지고 각자 전투 위치로 달려갔지. 적함의 좌현 후미 3마일(약 5.4km) 거리에 접근했을 때 3인치 포의 첫 발이 날아가면서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확 풀렸어. 모의탄만 쏴봤지, 실탄 사격이 처음이잖아. 과연 제대로 날아갈까 걱정했거든. 적함과의 거리를 3000야드(약 2.7km)까지 좁히고 비 오듯 적탄이 날아오는 가운데 열난 총신을 냉수 적신 수건으로 식히면서 포격전이 20여 분 계속됐는데, 최용남 함장이 묻더군. “포탄 몇 발 쐈나?” 우리가 가진 포탄은 모두 100발인데 이미 30발을 쐈어. 포탄을 다 쏴버리면 전투도 중단해야 해. 적함이 부산에 상륙할 경우 피해는 막심할 거라 생각했지. 결국 함장이 결단을 내렸어. 적함에 1000야드(약 914m)까지 접근해 적 함교와 기관실에 포격을 집중하기로. 백두산함이 최고 속력으로 적함을 향해 돌진하며 쏜 포탄이 드디어 적선의 함교를 폭파하고 적함 마스트가 꺾여나갔어. 백두산함에선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어. 새벽 1시 10분경 적함과의 거리가 300야드(약 274m)까지 좁혀졌는데, 이때 적함에서 발사된 포탄 한 발이 백두산함의 조타실을 뚫었고, 다른 포탄이 주포 갑판에 떨어졌어. 적 함정 격침에만 집중하다 보니 함미의 적 주포가 손상되지 않은 걸 놓친 게야. 조타수 김창학, 장전수 전병익이 쓰러졌어. 군의관 김인현 중위가 심한 뱃멀미로 목에 깡통을 단 채 응급수술을 했지만 피를 많이 흘린 두 병사의 상태를 돌이키지 못했지. 1시 30분 적함 격침 소식이 전해졌어. 두 병사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한 말이 “대 한민국…”. 지금도 그들이 마저 하지 못한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을 지켜다오” 소리가 들리는 듯해. 이후 백두산함에 탑승해 인천철수작전, 여수철수작전, 인천상륙작전 등에 참가했고 1년 반 뒤 다른 업무를 맡았지. 우리가 강원도로북상하다 우연히 발견한 적함을 격침시킨 대한해협해전 승전은 우리 해군 첫 전투의 승리이자 6ㆍ25전쟁에서 우리 군의 첫 승리의 기록이야. 또한 유엔군의 병력과 군수물자가 원활하게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해상 교통로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지. 미군이 부산항에 도착한 것이 대한해협해전 5일 뒤인 7월 1일이었고, 이후 부산항은 연인원 500만 명, 군수물자 5200만 톤, 유류 2200만 톤을 수송하는 핵심 항구가 됐지. 그때 적함이 부산항에 들어왔다고 생각 해봐. 역사가 바뀌었을 거야. 정전 60주년인 2013년 6월 26일 열린 대한해협해전 전승 기념식.(사진=동아DB) 민간 함정 문산함 선장 꼭 찾아내 기억했으면 해 기자, 이걸 좀 꼭 다뤄줘. 백두산함이 참가한 여수철수작전에 상륙정으로 차출됐던 민간 함정 문산함 선장이 누구인지 지금이라도 꼭 찾아야 해. 쏟아지는 적의 탄알 속에서 해상으로 후퇴하는 경찰관들을 기다렸다가 다 태우고 후퇴하고, 다음에는 포항 북쪽 장사동 해안 전투에 참가했다 선원 6명과 함께 모두 전사했어. 장사동 전투는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이야. 이분들이 누구인지 꼭 찾아내야 해. 이런 분들 같은 이름 없는 영웅들을 같이 기억하고 기려야 해. 이런 분들을 기억하고 기리지 않는다면 누가 앞으로 국가와 공동체의 위기에 나서주겠나. 전쟁이 벌어지면 민간인들과 민간 선박들도 다 동원돼. 육상전에서는 지게부대들이 보급품을 지고 날랐어. 부산 시민들은 전국에서 몰려든 200만 피난민들에게 지낼 곳을 내어주고 김치, 된장, 고추장을 나누며 보살폈지.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란 노랫말에는 부산 시민들의 끈끈한 정이 담겨 있어. ‘도라무통’을 반 자르면 의자가 되고 그대로 놓으면 테이블이 되는 시절이었지. 그런 환경 속에서도 함께 어려움을 극복한 정이 우리를 살린 거야. 백두산함 승조원이 모두 76명인데, 정전 60주년에 20명이더니 지금은 14명만 생존해 있어. 우리 세대는 얼마 남지 않았어. 난 20년간 한국해양소년단연맹 고문을 하면서 강의를 해. 아이들이 아니라 교장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내 스피커가 되어달라는 의미에서지. 교장들에게 특별히 부탁하는 것이 아이들의 국가 혼(魂)을 키워달라는 것이야. 우리가 지금 단군 이래 최고의 경제적 성과를 누리고 있는 기적의 원천은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국가 혼을 심어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해. 대한민국이 얼마나 귀한 나라인가. 6ㆍ25전쟁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보전됐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국민이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섰기 때문이야. 엄마가 내어주는 쌈을 먹고 싶어 하던 어린 소년병들까지 나라를 지키다 죽어갔어. 아이도 어른도 모두 대한민국을 지키려 했어. 그래서 대한민국이 살아난 거야. 예전 월남은 월맹보다 20배 우세한 경제력을 갖고도 하루 세 끼를 못 먹던 월맹에 망했어. 제 나라 국민이 제 나라를 지키려 하지 않으면 도와주려는 나라가 없어. 6ㆍ25전쟁 때 세계 91개국 중 67개국이 대한민국 편에 섰어. 남녀노소 없이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서는 굳은 정신을 본 67개국이 한국 옆에 섰다니까. 이게 대한민국의 오늘이 된 역사야. 이후 세월도 눈물 없이 표현할 수가 없어. 서독으로 간 광부와 호사들, 월남 파병 병사들이 달러를 벌어왔어. 원양어선 타고 고기잡이 하러 간 사람들도 죽음의 위험을 견뎌내며 달러를 보냈지. 게 한국에서 공장이 됐어. 밤낮 없이 일하던 구로공단, 그래서 수출을 했고 오늘이 된 거야. 백두산함의 장전수 고 전병익 중사의 동상. 매년 6월 26일 전승 행사 대한민국 국민 대단한 거야. 그래서 우리 젊은이들에게 부탁 좀 하지. 우리 민족이 백년, 천년 살 대한민국을 잘 가꿔야 해. 애국심 말하는 나 같은 늙은이 고리타분하다, 꼰대다 그럴지 모르지만 젊은이 여러분 자신을 위해, 또 자손들을 위해 대한민국이란 나라 소중히 잘 가꿔줘. 최영섭 고문은 대한해협해전 등의 전공을 인정받아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 등 20여 개의 훈ㆍ포장을 받고 1968년 전역한 후 최근에는 한국해양소년단연맹 고문으로 활동하며 국가 혼을 심는 교육과 백두산함 전사자들을 기리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가 가진 백두산함 전우수첩에는 주소며 연락처, 배우자 이름이 빼곡하다. 그 위로 몇 년 몇 월 사망했다는 빨간 글씨가 적혀 있다. 이 빨간 글씨는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백두산함은 1959년 7월 퇴역했다. 선체가 해체된 뒤 백두산함 돛대는 해군사관학교 내에 남아 2010년 등록문화재(제463호)로 지정됐다. 해마다 부산에서는 매년 6월 26일 대한해협해전 전승 행사가 열린다. 최 고문의 서재에는 빛이 바래 얼굴선마저 희미해 보이는 옛 동기들의 사진이 담긴 액자가 놓여 있다. “둘은 6ㆍ25 때 죽은 해군사관학교 동기이고, 다른 둘은 백두산함의 김창학, 전병익이야. 기억해줘야 하잖아, 동기이고 전우니까….” 사진마저 흐려진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노병의 기억은 스물 몇 살의 앳된 시절을, 국가의 위기 앞 에 아낌없이 불사른 청춘들을 선연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위클리공감][자료제공 :(www.korea.kr))]
- 관리자
- 2015-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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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화합’과 ‘튼튼 안보’…통일열차는 두 바퀴로 달린다
올해는 광복 70년과 6 ㆍ 25전쟁 발발 65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 어느 때보다도 평화와 통일, 경제혁신의 반석을 단단히 다질 때다. 그렇기에 더 절실해지는 건 세대화합. 은 광복의 환희로 충만했던 1945년에 태어나 대한민국 발전의 원동력이 된 광복둥이 어르신과 미래 주역인 청년 간 세대를 뛰어넘는 소통과 공감을 모색하기 위해 ‘세대화합 통일열차’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서울역과 도라산역을 오가는 ‘평화열차 DMZ-트레인’을 타고 떠나는 여정이다. 도라전망대 앞에서 하트를 그리는 ‘세대화합 통일열차’ 프로그램 참가자들. 왼쪽부터 김태형, 이상진, 황인용, 이금주 씨. 무더운 날이 되지 싶다. 벌써부터 녹록잖은 열기가 은근히 온몸을 달궈오는 6월 2일 아침. 서울역사 경의선 철도 선로에 알록달록한 색감을 뽐내는 3량짜리 열차 한 대가 출발 신호를 기다린다. 서울역을 출발해 능곡역~문산역~운천역~임진강역~도라산역 구간을 오가는 4881호 ‘평화열차 DMZ-트레인(이하 평화열차).’ 코레일이 ‘평화의 땅’인 비무장지대(DMZ)를 여행할 수 있게 운영하는 안보관광 열차다. 객차 외부엔 CJ E&M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에 등장하는 로봇 캐릭터들이 빼곡히 그려져 지나치는 이들의 시선을 잡아챈다. 마치 동심 속에서 갓 뛰쳐나온 듯한 모습. 그렇다. 세대 차를 뛰어넘어 교감할 수 있는 동심 콘텐츠를 열차라는 교통수단과 절묘하게 콜라보레이션한 이 ‘창조경제’의 공간에서 어떤 편견과 선입감도 떨친 세대화합을 위한 ‘마주 보기’가 막 시작될 참이다. 평화와 통일을 향한 ‘소통’과 ‘공감’의 방담(放談) 자리다. 오전 9시 22분. 열차 출발! 2호 객차 ‘사랑실’ 탑승자 4명이 오늘의 주인공. 1945년에 태어나 대한민국 발전의 원동력이 된 광복둥이 어르신 2명과 미래 주역인 청년 대학생 2명이다. 황인용(70) 씨는 41년 6개월간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2007년 8월 교감으로 퇴직한 뒤 부인과 함께 은퇴 생활을 즐긴다. 서예와 사군자가 취미 수준을 넘어선다. 제자 중 6학년 때 담임을 맡았던 김경란 아나운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이상진(70) 씨는 베트남전 참전 등 31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16년 전 육군 제35보병사단 부사단장직을 끝으로 예편한 예비역 대령이다. 황 씨와는 함께 서예와 사군자를 취미로 하면서 일주일에 한번씩은 꼭 만나는 ‘절친’ 사이. 지역 산악회 회장도 맡고 있다. 김태형(23) 씨는 한국외국어대 정보통신공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다. 네트워크 전문가가 되는 게 꿈. 2012년 3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경기 평택시 해군 제2함대사령부 소속으로 고속정인 참수리정을 타고 군 복무를 했다. 성신여대 영문과 4학년인 이금주(25) 씨는 월간 군사전문잡지의 인턴으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등 유명 인사의 안보 관련 연설문을 발췌해 번역하는 일을 했다. 뜻밖에도 이 씨의 장래 희망은 스튜어디스. 다른 사람을 잘 돕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잘 기울이는 적성을 활용하고 싶어서란다. ‘사랑실’엔 네 사람 말고도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20, 30대 젊은 층도 적잖게 탑승했다. 일행과 함께 사진을 찍는 외국인도 드문드문 눈에 띈다. ‘평화열차 DMZ-트레인’을 타고 방담을 나누는 광복둥이 어르신과 청년 대학생들. 로봇 캐릭터 입힌 ‘평화열차’ 지나치는 이들 시선 사로잡아 네 사람은 이날 오전 8시 30분 서울역 대합실에서 처음 얼굴을 마주했다. 그럼에도 40여 년 세월의 간극이 불러올 법한 서먹함도 잠시, 이내 마음이 푸근해지는지 만면에 미소가 가득하다. 여행의 설렘이 주는 마법이란 그런 걸까. 올해가 광복 70년 되는 해인 데다 안보관광 열차를 타서인지 대화는 자연스레 광복과 6ㆍ25전쟁 이야기로 이어진다. 김태형_ “6ㆍ25전쟁은 교과서나 다른 책 혹은 영화를 통해 접했지만, 광복에 대해선 진짜 생각해본 적 없어요. 그냥 유관순 열사, 3ㆍ1절같이 일제강점기의 인물과 역사적 사건밖에 떠오르지 않아요.” 이금주씨. 이금주_ “마찬가지예요. 학교 수업 때나 문학작품, 영화를 통해 접한 게 거의 다죠. 사실 광복 하면 떠오르는 게 근현대사 책 표지예요. 태극기 흔들며 기뻐하는 사람들, 항일 애국지사들 사진이 실린. 흑백사진이라 그런지 더 아득한 느낌이 들어요. 최근 안중근 의사를 소재로 한 뮤지컬 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는데, 안타까운 점 도 적잖았어요. 우리에겐 안 의사뿐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가 있었는데, 그분들 모두가 빛을 본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런 분들까지도 더 많이 자주 문화예술 콘텐츠로 다룬다면 젊은 층의 이해를 구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김태형_ “맞아요. 광복 70년이라곤 하지만 마음에 와 닿기보다는 글자 그대로밖엔 안 느껴져요. 모든 세대가 공감하고 그 느낌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게 아쉬워요. 그래서 요즘 세대가 좀 더 알기 쉽게 오늘 같은 안보관광 프로그램을 잘 운영하고 확산시키면 어떨까 합니다.” 이상진씨. 이상진_ “솔직히 우리도 광복에 대해선 잘 몰라. 그때 막 태어났으니까. 다만 6ㆍ25전쟁 땐 여섯 살 때니 부모님 등에 업히거나 손잡고 걸어서 피난 갔던 기억은 많이 나. 광복이라는 게 글자 그대로 옮기면 ‘빛 광(光)’에 ‘돌아올 복(復)’. 즉, 빛을 되찾았다, 그거 아닌가? 어둠으로부터 빛의 세계로 빠져나왔다는 거거든. 다시 해석하면 나라의 주권을 되찾았다는 뜻이지. 그러면 그 어둠이 뭐냐? 그게 35년간의 일제 식민통치지. 우리말과 성씨(姓氏)를 빼앗기고, 식량도 죄다 일본으로 실어가고, 징용하고 위안부로 끌고 가고, 문화재 다 빼앗기고…. 그런 게 식민통치란 말이야. 만일 내가 훨씬 일찍 태어나 그런 비참한 상황에서 살았다면 현재 이렇게 살아 있을까?” 황인용_ “말이 광복둥이지 우린 광복 당시의 기쁨을 잘 모를 수밖에 없어. 태어나서 몇 년 후 바로 6ㆍ25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광복의 기쁨을 충분히 느낄 새도 없이 대단히 힘든 상황에서 살아야 했어. 전쟁 통에 학교도 못 가서 서당에 다니며 한문 공부를 했지. 전쟁 끝나고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들어가려니 이미 아홉 살이었지. 그저 전쟁의 폐허에서 격동기를 어렵게 헤쳐 나온 것만 기억 나. 중학교 갈 형편이 못 되니 담임선생님이 갖다 주신 중학교 장학생 선발고사 원서를 써서 합격해 3년 내내 특급장학생으로 다닐 수 있었어.” “전쟁 나면 가정도 나라도 다 깨져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 이상진_ “6ㆍ25전쟁 때 선친의 4형제 중 막내가 경찰관이셨어. 그땐 의용군도 있었지만 통상 경찰 중심으로 마을 방어를 했어. 그랬는데, 1953년 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 어느 날 저녁에 누군가가 막내 작은아버지를 잡아갔어. 그러곤 곧 죽임을 당하셨지. 그리도 허망하게 돌아가시니 작은어머니와 어린 조카 둘만 남은 그 가정은 완전히 분해됐어. 조카들이야 우리 집에 데려다 키우고 나중에 시집까지 보냈지만, 당시 작은어머니는 젊으니까 재가를 하셨어. 그처럼 전쟁 나면 가정도 나라도 다 깨지는 거야. 전쟁에 빨려 들어간 개인의 인생이란 건 슬픈 거지.” 황인용씨. 황인용_ “당시 많은 사람이 무고하게 희생됐어. 우리 가족 중에도 그랬던 이들이 적지 않아. 내 선친도 그때 돌아가셨어. 장형, 그러니까 큰아버지의 맏아들이 상시적으로 부역을 했는데, 9ㆍ28 서울수복 직후 부역자를 잡아다 총살시키려니까 선친께서 ‘내 조카이니, 좀 봐달라’고 사정하다 같이 총살당하셨어. 전쟁이란 그런 거야. 양민임에도 억울하게 당한 사람이 그렇게나 많았어. 결국 어머니 혼자서 7남매를 교육시키느라 무진 고생을 하셨어. 고생도 고생이지만,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 그때 난 전쟁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된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깨달았어.” 김태형_ “제 할머니가 1929년생이신데, 명절 때 찾아뵈면 옛날 얘기를 많이 들려주세요. 할머니 얘기와 광복둥이 두 어르신의 말씀에 겹치는 부분이 많아요. 전쟁의 끔찍한 참상과 당시의 힘들었던 상황에 대한 내용이요.” 이금주_ “외할아버지가 계시는데, 과묵하신 편이라 말씀을 되게 아끼세요. 그래서 옛날 얘기 들을 기회가 거의 없는 게 아쉬워요.” 평화열차 내부에 전시된 분단 역사 사진과 통일 기원 엽서. 평화열차여서일까. 객차 내부엔 안보관광을 떠나는 사람들의 통일 기원 사연이 적힌 엽서들이 벽면에 대롱대롱 걸려 있다. 객차 윗 부분엔 DMZ에 서식하는 동식물, 분단의 역사를 상징하는 사진과 설명들이 붙어 있다. 객차 내부 한쪽에 자리한 작은 매점 겸 승무원 부스엔 DMZ 기념엽서도 비치돼 있다. 좌석엔 형형색색의 바람개비, 천장엔 하트, 바닥엔 연꽃무늬가 촘촘히 박혀 있다. 일견 화려하기까지 하다. 어쩌면 안보관광 열차라기보다는 소풍을 떠나는 듯한 분위기. 그럼에도 네 사람의 대화는 자못 진지하다. 이들은 광복 70년의 영광을 가져올 수 있었던 대한민국 발전의 원동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할까. 도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녘 땅. 객차 벽면에 걸린 엽서‘우리도 한번 통일해보세!’ 이상진_ “6ㆍ25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 초만 해도 남북한 국민총생산(GNP)을 비교하면 북한이 남한보다 두 배가량 많을 정도였어. 남한은 광복 이후 바로 전쟁이 터졌으니 완전히 폐허 상태였지. 공장이란 건 찾아볼 수도 없고, 그저 남은 건 사람밖에 없었어. 그래서 인력집약적 정책을 써서 시작한 게 서울 구로공단이야. 거기서 가발을 비롯해 신발, 의류, 합판 등을 만들어 수출하기 시작했어. 국민학교 갓 졸업하고 상경한 14, 15세 어린 소녀들이 거기서 여공으로 공장 일을 했어. 그렇게 해서 시골에 있는 자기 가정을 살렸어. 당시엔 국가 경제를 살리려 해도 돈이 없었지. 때마침 베트남전이 터졌어. 청룡, 맹호, 백마, 십자성부대가 파병됐지. 전쟁 기간에 연인원 34만 명이 베트남으로 갔어. 그때 내 나이 25세로 육군중위였는데 자원해서 참전했어. 30명 소대원을 이끄는 소대장으로 적 29명을 죽였지. 두려움? 그저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 이금주_ “역사의 산증인이세요. 베트남전은 저는 다 영화로….” 이상진_ “그때 파병된 장병들에겐 미국이 1인당 월 500달러의 전투 수당을 지급했어. 그 돈의 10분의 9가 우리나라 경제 발전 자금으로 쓰였어.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건설…. 독일에 광부, 간호사 파견해서도 외화를 벌어들였지. 1973~74년 국제 유류파동 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중동의 사업들을 수주했어. 그처럼 국가 발전을 위해선 훌륭한 국가지도자의 역량이 중요했고, 우리 국민의 애국심과 근면성도 큰 역할을 했어. 본인은 못 배웠지만 자녀라도 잘 가르쳐서 잘사는 나라로 만들어보자 하는 애국심이 있었지.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 새마을운동 들어봤지? 이제 ‘우리도 한번 통일해보세!’라고 자꾸 외치다 보면 통일은 반드시 이뤄질 거야. 세 번째 원동력은 지금껏 꿋꿋이 나라를 지켜온 국방력이라 생각해.” 황인용_ “교육적 측면에서 얘기한다면 정말 우리 부모님들의 교육열은 절박하고도 강했어. 난 허리띠 졸라맬 만큼 못살아도 자식만은 잘 키워야 한다, 잘 가르쳐야 한다는 일념으로 교육에 투자했기에 그동안 교육제도가 여러 번 바뀌긴 했어도 잘돼온 거야. 비록 입시교육이라 하더라도 열심히 했기에 많은 인재를 배출했고, 오늘날 디지털혁명도 가능했던 거야. 그래서 이렇게 성공한 우리나라의 평화를 지켜야 하는 거지.” 이금주_ “질문이 있는데요. 교직생활을 오래 하시면서 어떻게 학생들을 더 잘 가르쳐야 할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셨을 텐데요.” 황인용_ “교육과정이 여러 번 바뀌었잖아. 주입식 교육에서 사고력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 그다음엔 탐구력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 그래서 박사들이 연구하는 탐구과정을 초등학교 때부터 거치게끔 해서 학생 스스로 발견하고 찾아나갈 수 있는 자기주도적 학습을 해야한다 등으로 여러 차례 바뀌었어. 그래선지 요즘 초등교육은 잘돼. 그런데 중등교육은 아직도 주입식을 떨치지 못했어. 그러나 외우는 교육은 이제 쓸모없어. 뭘 스스로 찾아나가는 방향으로 교육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봐.” 제3땅굴 관람을 위해 탑승하는 모노레일. 상부상조하는 우리 국민성공동체의식 되살려야 열차가 덜컹거릴수록 대화도 한층 무르익는다. 함께 보고 듣고 느끼는 교감이란 바로 이런 것이리라. 이상진_ “과거 새마을운동도 마을 공동체가 했어. 어느 마을에 일정 구간 도로를 내주면 해당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도로를 정비했지. 자기 일거리가 많아도 그것부터 먼저 했어. 그런데 지금은 어때? 자기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지 않으면 빨간 머리띠 두르고 결사반대하는 세상이야. 국가 정책 수립에 결정적 구실을 해야 할 정치인들조차 한목소리를 내지 않고 서로 발목 잡고는 선거 때 표나 의식해. 난 그런 현상이 다 공동체 이익에 반하고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라 생각해.” 황인용_ “원래 우리 국민성은 상부상조하는 거였는데, 점차 물질만능주의로 변했어. 국익과 공익보다 사익만 추구하는 사회로 변했어. 그래서 국민이 다시금 뭉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해.” 김태형씨. 김태형_ “제 생각엔 개인주의로 나아간다는 게 마냥 나쁜 것이라기 보다는 시대적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집단보다는 개개인이 더 중요한 걸로 배워왔고, 개인주의 자체가 나쁜 건 아니죠. 사실 공동체 의식이란 게 싹튼 것도 옛날엔 모두들 다 같이 못살았으니까 잘사는게 목표였기에 그럴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런 것처럼 지금 우리에게 항시 다 함께 꿈꾸고 나아갈 목표가 주어진다면 숨어 있던 공동체의식이 다시 발현되지 않을까요?” 이금주_ “그 의견에 동의해요. 예전의 공동체의식이 주로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한 것이었다면 이젠 좀 다른 면으로 발휘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요. 제가 요즘 많이 듣는 얘기가 일명 ‘노 키즈 존(No Kids Zone)’인데, 아이들을 출입할 수 없게 하는 카페나 식당 등이 조금씩 생겨나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견해예요. 요즘 아이들이 너무 버 릇이 없는 데다 부모가 제재를 하지 않으니 부모랑 아이들이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만들자는 발상이죠. 저는 이런 것도 공동체의식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과거엔 공동 육아 개념도 있었잖아요. 그렇더라도 대한민국의 원동력이 전 세대가 공동체의식으로 뭉쳐 다 같이 잘살려고 노력한 데서 비롯됐다고는 생각해요. 그래서 부(富)를 창출했고 그 덕을 보는 저는 정말 축복받은 세대라고 느껴요. 이젠 우리 세대에서도 나 혼자만 성공하는 게 아니라 그 성공의 열매를 같이 나누고 다 함께 잘살 수 있도록 공동체의식을 지니는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분단의 끝, 통일의 시작’안보관광의 개시 지점 오전 10시 25분, 임진강역에 다다른다. 도착 전에 반드시 신분증(외국인의 경우 여권)을 준비하고 도라산역 출입 신청서를 써야 한다. 역에 도착한 뒤엔 헌병들의 인솔에 따라 민간인 통제구역(민통선 : 남방한계선 아래 5~20km에 걸쳐 설정한 지역으로 허가 없인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는 구역) 출입을 위한 신원 확인과 인원 점검을 거친 뒤 열차에 다시 탑승한다. 평화열차만의 특별한 경험이랄까. 헌병들이 동승하자 열차는 바로 임진강역을 떠나 도라산역으로 향한다. 이어 어느덧 임진강역과 도라산역 사이 철교 위를 달린다. 이 철교를 지나면 청정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DMZ의 시작. 차창 밖으로 6ㆍ25전쟁 당시 파손된 철로의 교각들이 획획 지난다. 어디 그대로인 것이 자연 풍광뿐이랴. 전쟁의 상흔도 그대로다. 오전 10시 40분에 임진강역을 출발한 열차는 불과 10분 만에 도라산역에 도착한다. 서울과 북한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 철도의 역 중 하나인 도라산역은 파주시 장단면 도라산리 민통선 안에 있다. 해발 156m의 도라산에서 역 이름을 따왔다. 2000년 시작된 경의선 복원사업에 의해 들어서게 됐고, 남쪽의 임진강역까지 4km 구간을 연결하는 공사가 완료됐던 2002년 2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방한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함께 이 역을 방문해 연설하고 철도침목에 서명하는 행사를 가짐으로써 한반도 통일 염원을 상징하는 대표적 장소로 떠오르기도 한 곳이다. 또한 통일이 되면 서유럽까지 갈 수 있는 유라시아횡단철도의 시작점일 것으로 유력시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도라산역 역사에 적힌 ‘남쪽의 마지막 역이 아니라 북쪽으로 가는 첫 번째 역’이라는 문구에 애잔한 마음이 서린다. 열차에서 내려 남북출입사무소를 통과한 뒤 셔틀버스로 갈아타고 향하는 곳은 도라전망대. 전망대 외벽엔 육군 제1보병사단 마크와 함께 ‘분단의 끝, 통일의 시작’이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서부전선 군사분계선 최북단에 자리해 북녘 땅이 보이는 곳. 본격적인 안보관광의 개시 지점이다. ‘세대화합 통일열차’ 일행이 도라산평화공원에서 DMZ 특별사진전을 관람하고 있다. 개성공단, 송악산, 기정동 마을손에 잡힐 듯한 북녘 땅 먼저 전망대 건물 2층 관람석에 앉아 6ㆍ 25전쟁의 배경과 내용, 전방 지역에 관한 설명을 7분짜리 영상물을 보면서 듣는다. 중국인을 비롯한 외국인 관광객도 적지 않다. 표정들이 진지하다. 총성과 포화가 멈춘 곳이 외국인도 즐겨 찾는 인기 관광지로 변모한 셈이다. 해설자의 설명이 시작된다. “이곳은 국내에서 군사분계선을 낀 가장 큰 대국민 안보관광지입니다. 연간 80만 명 이상이 다녀갑니다. 3년 전부터는 외국인 관광객이 내국인 관광객을 추월했습니다. 외국인 관광객이 60% 이상입니다. 100명 중 90명은 중국인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앞쪽의 숲이 바로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간, 1120일간의 6ㆍ 25전쟁으로 생긴 우리나라 분단의 현장인 비무장지대입니다. 잘 보이시죠? 1.2km 앞에 물이 고인 약간 작은 웅덩이 보이시죠? 지금 가물어서 웅덩이가 10분의 1 정도로 축소됐는데, 사천호라는 저수지입니다. 저기부터 북한 땅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가깝죠?….” 관람석을 나서서 전망대 주변에 설치된 유료 망원경에 500원짜리 동전을 집어넣는다. 개성시 변두리 풍광이 손에 잡힐 듯 아른거린다. 개성공단을 비롯해 송악산, 장단역, 북한 선전마을인 기정동 등이 바라보인다. 송악산 중턱엔 높이 20m의 김일성 동상도 세워져있다. 두 대학생은 일반인의 발길이 허용되지 않는 DMZ 모습을 한번이라도 더 보려고 망원경을 이리저리 돌린다. “오, 있어요, 있어. 북한군 초소. 되게 조그맣게 보여요.” 열차 출발시각에 맞추느라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선지 시장기가 몰려온다. 도라전망대를 둘러본 후 파주시 군내면 통일촌의 식당으로 이동해 장단콩으로 이름난 이곳 된장찌개로 점심식사를 했다. 정담은 끊이지 않는다. 이상진_ “젊은 사람들은 된장찌개 잘 안 먹던데.” 이금주_ “전 좋아해요.” 이상진_ “어? 차이가 많이 날 줄 알았더니 안 그러네.” 이금주_ “처음엔 계속 파스타, 피자 같은 게 당겼는데, 자꾸 먹다 보니 다시 돌아오더라고요, 입맛이.” 이상진_ “나도 손주들이랑 가까워지려고 피자도 먹고 그래.” 도라전망대 인근엔 제3땅굴이 있다. 이곳을 놓칠 수 없다. 1978년 발견된 제3땅굴은 길이 1635m, 높이 2m, 폭 2m로 시간당 3만 명의 병력이 이동 가능한 규모. 서울과 가장 거리가 가까운 남침용 땅굴이다. 땅굴 앞엔 분단의 역사와 자연생태계를 담은 입체영상물을 상영하는 DMZ 영상관, DMZ 관련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는 전시관, 상징 조형물, 기념품 판매장 등이 설치돼 있다. 광복둥이 어르신과 청년 대학생들이 도라산역으로 향하는 평화열차 안에서 비무장지대(DMZ) 풍광을 바라보고 있다. 분단의 현장서 만난공기처럼 소중한 평화 오후 1시 10분. 모노레일을 타고 경사진 터널을 내려간 뒤 수평으로 이어지는 땅굴 내부를 관람한다. 길이 170m인 관람 허용 지점까지만 가볼 수 있다. 더 이상은 막혀 있고, 철조망도 설치돼 있다. 땅굴 관람 땐 입구에서 나눠준 안전모를 꼭 써야 한다. 천장이 낮아 자칫 머리를 부딪칠 수 있기 때문. 땅굴 속은 습기로 눅눅하고, 바닥은 미끌미끌하다. 고개를 숙이고 땅굴 속을 걷느라 목과 허리가 아프지만 1시간 동안의 땅굴 체험은 많은 걸 깨닫게 한다. 병력 침투를 위해 북쪽에서 남쪽으로 판 땅굴. 이 역시 분단의 아픔을 한눈에 보여주는 징표다. 땅굴을 관람한 뒤 도라산평화공원을 거닌다. 2008년 6월 완공된 곳으로, 분단의 벽을 묘사한 각종 전시물이 여럿 있고 DMZ 특별 사진전도 열리고 있다. 6ㆍ25전쟁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세기의 섹스 심벌 마릴린 먼로의 사진도 눈에 띈다. 이상진_ “예전에 와봤어도 난 역시 땅굴이 가장 기억에 남아. 적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 고스란히 현장으로 남아 있으니까. 슬픈 일이지. 한 민족이 둘로 나뉘어 있다는 게 그렇고, 서로 총구를 들이댄다는 것도 그렇지. 외국인 관광객들에겐 부끄러운 일이지.” 이금주_ “저도 땅굴이 인상적이었어요. 북한이 이렇게 침범하려고 했구나 하는 걸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거든요. 그것보다 더 부끄러움을 느꼈던 순간은 도라전망대에서 북녘 땅을 실제로 봤을 때예요. ‘아, 신기하다’ 하고 들떠 있는데, 이상진 선생님께서 ‘슬프다’고 혼잣말하시는 걸 듣고선 ‘아, 정말 내가 분단이라는 상황을 남 일처럼 생각하고 있었구나’ 하고 반성했어요. 땅굴도 한 5m 아래 흙을 판 것정도로만 짐작했는데, 바위를 뚫어서… 제가 무지했다는 걸 오늘 많이 깨달았어요.” 김태형_ “저는 도라전망대가 인상 깊었어요. 땅굴은 예전에도 가봐서 감흥이 그렇게 크진 않았는데, 전망대에 직접 가보니 정말 개성의 아파트와 고층빌딩이 보였어요. 차로 달리면 불과 15, 20분이면 갈 거리를 갈 수 없다는 것에 말로만 듣던 분단의 현실을 제대로 느끼게 됐어요.” 이금주_ “친구들한테 여기 여행 오는 걸 권하고 싶어요. 그리고 제 바람대로 스튜어디스가 되면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가볼 만한 곳으로 꼭 안보관광지를 추천하고 싶어요. 분단의 현실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게 좀 부끄러울 수도 있지만, 다시 한 번 평화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가장 좋은 학습장이 될 테니까요.” 그들의 말대로, 평화롭게만 살다 보면 자칫 평화의 소중함과 분단의 현실을 잊기 쉽다. 공기의 소중함을 종종 잊고 살듯이. 도라산역에서 다시 평화열차에 올라 임진강역에서 내린 뒤 들르는 마지막 코스는 임진각 평화누리. 2005년 임진각 관광지 내 약 99만㎡의 면적에 조성한 복합 문화공간이다. 네 사람은 이곳에서 다시 대화를 이어간다. 광복둥이 어르신과 청년 간 세대를 뛰어넘는 오늘의 ‘특별한 만남’에 대한 각자의 소회는 어떨까. 대화 잘 통하는세대 뛰어넘은 ‘특별한 만남’ 황인용_ “40년 이상 나이 차가 나는 젊은이들이랑 쭉 얘기해봤는데, 크게 세대 차를 느끼질 못했어. 내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주고 잘 수긍하기도 했고. 큰 갭(Gap : 차이)을 못 느껴. 결국 큰 목표를 위해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우리 국민 모두가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에 네 사람이 공감한 듯해. 다만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선 자칫 분단의 아픔을 채 실감하지 못하거나 잊게 되는 게 문제지.” 이금주_ “저는 1958년생인 아빠랑 얘기할 때도 세대 차를 느낀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신문을 읽으면서 아빠한테 ‘아빠, 이런 건 어떤거 같아? 내 생각은 이런데…’라고 여쭸을 때 아빠가 ‘아니야, 네 생각은 좀 어린 생각이야’ 하시면서 그 이유를 대실 때 사실 그걸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오늘 아빠보다도 훨씬 연세가 많으신 두 어르신과 얘기가 잘 통할까 의구심이 없지 않았는데, 대화가 무척 잘돼 솔직히 놀랐어요.” 김태형_ “저희 아버지는 1962년생이신데, 제 경우엔 아버지랑 얘기할 때 그렇게 큰 차이를 느낀 적은 없어요. 그런데 할머니의 경우는달라요. 항상 길이 한 가지밖에 없다고 말하시거든요. 신문에 나온 그대로만 받아들이세요. ‘그러니 태형이 너도 이렇게 해야 한다’ 하는 식으로 말씀하시는데 우리 세대에선 더 많은 길을 생각해볼 수 있잖아요. 다양한 길을 검토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놀란 게, 황인용 선생님께서 저한테 보여주신 다이어리를 보면 사군자화가 엄청 많아요. 저한텐 기성세대는 일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는데, 그걸 보는 순간 ‘아, 평생 교육자로 살아오신 이분께도 자기만의 취미가 있고 특기를 퇴직 후에도 계발하셨구나’ 하는 생각에 그런 고정관념이 깨졌어요.” 이상진_ “집에서 우리 애들이랑 얘기하면 내 생각과 많이 다른데, 오늘은 그렇지 않네. 크게 다른 게 없고 먹는 것도 같아(웃음).” 어쩌면 오늘 함께한 평화열차 여행의 종착지는 ‘화합역’일지도 모르겠다. 제3땅굴 앞에서 세대화합 통일열차 프로그램 현수막을 펼치는 참가자들. 임진강 물결은 은빛으로 일렁이고…뭇 새들은 자유롭게 날건만 코레일이 지난해 5월 운행을 시작한 경의선 ‘평화열차 DMZ-트레인’은 DMZ 안보관광을 열차와 연계한 여행상품.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의 필수 여행 코스로 자리 잡았다. 올해 3월 현재까지의 이용객은 국내외 관광객 7만여 명. 4월부터는 주중(화∼금요일)엔 도라산역 일대 안보관광을 마치고 임진강역에 80분간 추가 정차해 임진 각과 평화누리 등 주변 관광지를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주말엔 운행 횟수를 1회 늘려 서울역과 도라산역을 총 2회 왕복 운행한다. 오후 4시 40분, 임진강역을 출발해 서울역으로 돌아오는 열차 안.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이다. 이금주_ “울타리 같은 안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하루예요. 오늘 아주 많이 배웠고, 정말 느끼는 바가 컸어요. 여정이 되게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했는데, 두 어르신께 직접 생생한 얘기를 듣게 돼서 기쁩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공동체정신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로 거듭나겠습니다.” 이상진_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인상이 좋았어. 근데 교과서적인 얘기만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현실을 자꾸 얘기해주니 깜짝깜짝 놀라. 내가 당부하고 싶은 건 태극기를 보면 손이 저도 모르게 가슴에 올라가는 그런 애국자가 됐으면 좋겠다는 거야.” 이금주_ “완전 ‘짱’이세요. 세대 차가 전혀 안 느껴져요. 국가를 향한 사랑도 끝이 없으신 것 같고.” 이상진_ “잘하면 옆구리 꾹꾹 찔러줘(웃음).” 김태형_ “처음 만나 뵌 어르신들인데도 말씀을 되게 잘해주셔서 많이 감사드려요. 두 분 다 평생 한 가지 직업만 갖고 성실한 삶을 살아오신 데 감명을 받았습니다. 어르신들, 항상 건강하세요.” 황인용_ “지금 하는 일에 신념을 갖고 꾸준히 해나가면 언젠간 달성할 수 있어. 그게 개인을 위한 성과더라도 궁극적으론 나라를 위한 것도 되니까 잘되길 바랄게. 열심히! 파이팅!” 호국보훈의 달 6월의 둘째 날에 돌아본 신록의 DMZ는 전쟁의 상흔에도 아랑곳없이 평화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해 길어진 여름 초입 오후, 여전히 쨍쨍한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일렁이는 임진강 은빛 물결엔 남북을 넘나드는 새들처럼 자유롭지 못한 분단의 현실이 새삼 비치는 듯했다. 평화와 통일을 간절히 바라는 북녘 동포의 애 타는 가슴 또한 그처럼 일렁이리라. 네 사람의 말없는 시선이 차창 밖 은빛 강물위에 함께 일렁인다. [위클리공감][자료제공 :(www.korea.kr))]
- 관리자
- 2015-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