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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DMZ 內 마을

사라져버린 마을흔적과 기억만큼은 또렷이

우리 마을에는 학교와 시장, 극장이 있어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북적이던 우리 마을이 사라졌습니다. 옆집 친구도, 시끌벅적했던 시장도, 사람들이 넘쳐났던 극장도 모두가 사라졌습니다. 전쟁은 하나의 땅을 반으로 가르기도 했지만, 우리 마을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사라져버린 마을

북적이던 이 마을을 누가 조용한 시골 마을로 만들었나

철원용암대지를 원동력으로 6.25전쟁 이전까지만 하여도 상당히 번성한 도시를 이루었던 철원, 한반도의 허리에서 남과 북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던 이곳은 1930년 당시에 춘천, 원주, 강릉의 견줄만한 규모의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이 한반도를 강제로 점령하면서 철원은 번영과 동시에 심한 수탈과 착취에 시달려야만 하는 아픈 역사를 가진 지역이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한반도가 북위 38°선을 기준으로 남한과 북한으로 분할됨에 따라 철원은 누구보다 큰 아픔을 겪게 된다. 북한 공산치하에 들어서게 되었고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강원도 최대의 곡창지대를 놓고 남한과 북한이 치열한 격전을 벌임에 따라 번성했던 철원은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그 번성했던 도시의 흔적은 민통선 내부와 그 이남 지역에 폐허로 남겨진 몇몇 건축물을 통해 살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건축물들은 일제강점기의 수탈을 겪은 이후 북위 38°선과 현재의 DMZ로 인하여 북한과 남한의 통치를 모두 받아온 수복지역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중요한 근대문화유산이 되어버린 것이다.

년도별 김화군,김화읍,철원군,철원읍의 거주 주민 수 비교

전쟁은 하나의 땅을 둘로 갈라놓아 우리 민족에게 아픔을 남겼지만 한때 북적였던 도시도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 철원은 2015년 기준 전체 인구수 47,537명으로 일제강점기 80,479명에 비해 약 40% 감소하였으며, 6.25전쟁 직후 (21,335명)에 비해 2배 이상 증가하였다. 또한, 철원군 내의 철원읍의 인구수는 번성했던 1930년대에 15,458명이었지만 현재, 약 1/3가 줄어 5,412명으로 그 수가 대폭 감소 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시계바늘을 돌려 사라진 마을의 시간을 찾아서

현재, DMZ 내 마을에서 가장 많은 가옥수가 있는 마을은 강원도 철원군 근북면 금곡리이다. 하지만, 오래 전 근북면 금곡리만큼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던 마을이 아니, 그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던 제 2,3의 금곡리 마을이 있었다. 과거의 철원읍 구 시가지는 외촌리, 사요리, 관전리, 중리, 월하리가 있었고, 김화읍 구시가지는 읍내리, 생창리가 존재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은 북적이던 이 마을을 사라져 버리게 만들었고,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한때 사람들로 북적였던 철원의 마을을 찾고자했다. 이를 위해, 조선시대부터 6.25 전쟁 이전까지의 일제강점기를 포함한 1910년~1953년까지의 철원 및 김화 관련 모든 신문기사 및 사료를 수집하고 철원읍 시가지와 김화읍 읍내리 지역의 자연, 지리적 환경, 역사적 환경, 인문환경을 찾기 위한 문헌조사와 현지답사를 진행했다. 또한, 마을의 대한 주민들의 기억 속 주요 사건, 주민들의 옛 이야기를 듣는 등 주민 면담을 통해 마을의 역사와 설화를 비롯한 생활상, 인구, 경제에 대한 기초 자료 수집을 진행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사라져 버린 마을을 다양한 스토리텔링으로 제작했고 해설 자료를 구비하게 되었다. 철원평야, 역주변이야기, 문화예술 이야기 등 주제별로 스토리를 나누어 역사의 아픔으로 잊혀져가고 사라진 마을을 기억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마을 복원사업은 인문학적 접근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복원이라는 용어에는 문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인 시각 개념이 포함되기 때문에 건물 중심의 정밀 복원도 제작이 필요했다. 우리는 복원도를 통해 가상으로 구현된 마을을 보면서 한 때 나마 북적이던 마을의 모습을 다시금 살려내고자 한다.

출처 : 좌(左)-강원도민일보(2008.06.24.), 우(右)-철원 김송일 제공 / 철원공립보통학교 단체사진(1935년, 좌)와 교사 전경(1938년, 우)

그 마을도 사람 사는 이야기가 있었다

어디든 사람들 사는 이야기는 똑같다. 그곳도 한때 그랬다.
사건, 사고 문화, 예술 이야기가 넘쳐났던 마을. 사라진 DMZ 마을의 스토리텔링은 철원평야 이야기, 철도 이야기, 시장이야기, 학교이야기, 문화.예술.체육.인물 이야기, 화강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과는 너무 도 다른 모습이기에 의아하고 낯선 모습들... 그때, 그곳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소개한다.

지금의 황금 들녘의 철원평야가 있기까지

현무암 용암 대지로 이루어진 철원 평야는 본래 벼가 잘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지역이다. 매년 가을 황금 들녘을 자랑하는 철원이 된 것은 1922년 수리조합 창립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농업이 주를 이루던 상황에서 자신의 경작지에 물을 댄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며, 이 농수는 가뭄과 한발의 갈증을 가시게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물을 가둔 제방이 붕괴되어 위험요소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출처 : 철원군 지방행정 60년사 / 봉래호저수지 준공(1923년)

1926년 강원도 철원 북면에 위치한 중앙수리조합은 토지매수와 공사설계에 대해 문제점이 많았는데 결국은 둑이 일부 붕괴되어 회산 일대의 가옥과 작물의 피해가 8천원에 달했다고 한다. 그 당시 30원이 현재 24만원 정도라고 하니 현재가치로 따지자면 피해 금액이 무려 6400만원 정도라 할 수 있겠다. 1936년 여름 석 달간 지속된 철원지방 대한발로 수리조합구역 밖의 천수답은 물이 말랐으나 수리조합 내의 논밭은 다행이도 모내기를 완료하여 수리조합의 의의를 다하였다.

수많은 짐을 싣고 날랐던 철원역 기차

1912년 10월 22일 조선총독부 총독이 오전 7시 30분 남대문역에서 기차에 오른다. 이 기차를 타고 출장을 가는 이유는 바로 경원선 철도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함이다. 이후 용산역에서 원산역에 이르는 경원선 철도(35역) 부설은 향후 철원의 성장을 예고하는 신호탄이 된 셈이다.

특히, 철원역사는 전체 규모 5만평이고 80명이 넘는 역원이 고용되었으며, 1937년 발행된 철원군지에서는 경원선을 이용한 인원(승하차)이 263,047명, 수화물 39,444개 53,188톤으로 내금강역까지 116.6km 4시간이 소요된다.

출처 : 매일신보(1912.10.24) / 철원역 개통식 참가자와 관광객

그러나 태평양 전쟁의 자재 확보 차원에서 일부 구간만 운행되고 6.25전쟁 이후 경원선과 더불어 전면 중단 되었다.

교통의 중심지로 사람들이 넘쳐났던 김화읍

‘모든 길은 로마로, 아니 김화로 통했다’라고 말할 순 없지만, 김화읍은 1,2등 도로가 관통하여 동쪽으로는 금성, 서쪽으로는 철원, 북쪽으로는 평강, 남쪽으로는 화천까지 연결되는 강원도 교통의 요충지였다.

5번 국도를 통해 강원의 수부도시인 춘천까지 자동차로 연결되어있으니, 서울사람들이 춘천에 가기를 경원선(증기기관차) -금강산전기철도(전기철도) -5번국도(자동차)경로로 이동하였다.

그 당시 한 기자는 이 경로로 철원-김화-화천-춘천을 유람하는 여행기를 써 신문에 기고했는데, 독자들의 열기가 뜨거웠다고 한다.

출처 : 매일신보(1912.10.24) / 철원역 개통식 참가자와 관광객

또한, 1924년 개통된 금강산전기철도는 여객수송뿐 아니라 화물도 실어 나르는 중요한 운송수단이 되었다. 그 당시 김화에서 채굴되는 황화철, 중정석, 망간 등의 특수 광물생산량은 당시 전국 1,2위를 다툴 정도였다고 한다. 콩과 밀, 임업부산물의 생산량도 강원도에서 상위에 있었다고 하니 김화읍의 번화함은 우리 상상 보다 이상이었을 것이다.

철원 경제의 큰 역할, 우시장의 이전

1931년 12월 한 시민대회가 개최 중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는 사건 중 하나를 논의하고 있는 모양이다.

바로 철원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우시장과 관련된 내용이다.

당초 우시장은 사요리 135번지(북관정의 북동쪽 약 200m)에 위치해 있었으나 1930년 전후로 교통 및 도시 계획의 중심지인 사요리역 부근으로 이전하자는 주장에 따라 시민대회를 통해

출처 : 동아일보(1931.12.27.) / 철원 우시장에 반대하는 시민대회의 결의문

이전 찬성과 반대 측면에서 열띤 논의를 하였으나, 결국에는 철원경찰서의 해산명령에 의해 위원회를 중심으로 하였던 시민대회는 해산되었고 1931월 11월 21일 읍의회의 결정에 따라 사요리 327번지로 옮기기로 상정된 안건이 가결된 사항이 그대로 이행되어 우시장의 위치는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보통학교 근처로 확정되고 만다.

문화인, 예술인, 체육인을 키워낸 마을

철원은 문화 예술 체육의 장소로서 북부지방순연의 마지막 공연이 주를 이루던 장소이다.

그 공연의 중심에는 철원극장이 있다. 무엇보다 철원극장은 마지막을 장식하는 ‘지는 별’과 최초라는 단어를 쓰게 하는 ‘뜨는 별’의 장소이자 문화예술인이라면 누구나 한번 이상 공연을 하던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

1940년 12월 24일 조선의 연인이라고 불리며 최고의 인기배우 차홍녀의 부고사실이 알려졌다. 22세의 짧고 강렬한 삶을 살다간 그녀의 마지막 공연장이 철원극장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깝고 아쉬울 뿐이다.

출처 : 동아일보(1934. 7. 5.) / 경성 이화여전 순회음악단 철원극장 공연

마지막 무대가 된 철원 극장에서 ‘지는 별’이 된 영원한 ‘홍도 , 차홍녀를 추억할 뿐이다. 지는 별이 있으면, 뜨는 별도 있다. 1941년 2월 1일 전국남여음악콜클대회가 성대하게 개최되었고, 이 대회의 우승자는 승승장구하여 배뱅이 굿으로 유명한 서도소리의 예능보유자가 된다. 그가 바로 명창 이은관이다.

출처 : 동아일보(1938.4.10.) /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신문광고

“왔구나~ 왔소이다~”, 최정승의 딸 배뱅이의 죽음과 한 건달의 이야기를 다룬 배뱅이 굿, 이를 서도소리로 재정립하여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로 인정받은 그는 철원에서 공립 보통학교를 나온 철원의'뜨는 별’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올림픽 출전선수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 그 당시 체육인으로 기억되는 사람은 손기정 선수일 것이다. 그러나 손기정 선수가 출전하기 전의 LA올림픽의 첫 선수가 바로 철원 출신의 황을수 권투선수이다. 그는 아마추어 동양 라이트급 챔피온이었으며, 이후 고향인 철원에서 권투대회가 열릴 정도로 고향에서의 많은 환대를 받은 사람일 것이다.

비록 올림픽에서의 패배는 아쉽지만 민족의 혼을 담아 혼신의 힘으로 권투에 임하여 당시 조선인들의 커다란 자랑거리였다. 이외에도 많은 유명인사들이 다녀간 장소인 철원극장은 비록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 우리 민족의 한을 다양한 장르를 통해 조금이나마 풀 수 있는 장소로 추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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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DMZ 사라진 마을 인문학적 복원 연구(2015.11.) 행정자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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