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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구한 젊은 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 작성자관리자
  • 작성일2016.06.24
  • 조회수1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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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예로운 무공훈장 가운데에도 최고등급인 ‘태극무공훈장’.

수상 대상은 ‘직접 전투에 참가해 지대한 공을 세움으로써 대규모 작전을 승리로 이끈 자’로 규정한다.

이러한 이유로 6·25전쟁 태극무공훈장 수훈자들은 주요 전투를 지휘해 승전보를 울렸던 장성들이 대부분이지만 병사들 가운데에도 극소수가 특출한 감투정신을 보여 영예를 안기도 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발간한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에 수록된 60명의 수훈자 가운데 병사는 단 세 사람. 홍재근 육군일등병과 김용식 육군일등병, 김옥상 육군일등병이 그 주인공이다.

백척간두에 놓인 나라를 위해 흘린 젊은 피,  6·25전쟁이 66년이 흐른 2016년. 세명의 위대한 병사의 이름을 다시 불러본다.

‘환상의 콤비’ 홍재근·김용식 육군일등병

태극무공훈장 수훈 병사 중 두 사람은 1950년 8월 진행된 기계 비학산 전투에서 함께 특공대에 자원해 적에게 치명적 타격을 입히고 아군이 승리의 기세를 타는 데 크게 기여한 홍재근·김용식 육군일등병이다.

홍 일등병과 김 일등병은 모두 중학교를 졸업한 뒤 6·25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5월 자원입대했다. 그들은 당시 급박한 전선 사정으로 인해 제대로 된 훈련과정도 거치지 못하고 입대한 지 1개월 만에 제주도 신병훈련소를 나와 이등병 신분으로 수도사단 17연대 3대대에 배속돼 9중대 3소대의 소총수로 전장의 최일선에 투입됐다.

이들이 전장의 한복판에 뛰어들었을 때, 우리 군은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지켜내며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홍 이등병과 김 이등병은 수도사단에 속해 안강-기계 지역 방어를 위해 전선에 배치됐다. 8월 15일까지 부산 점령을 목표로 했던 북한군은 8월 한 달간 총공세를 펼쳤으나 낙동강 도하 시도 등 교두보 돌파에 실패함으로써 당초 목표에 큰 차질을 겪고 있었다.

또 기계 탈환을 위한 수도사단의 총공격은 북한군 12사단과 766유격부대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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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이 발발한 지 66년이 흘렀지만 나라를 위해 한몸 바친 값진 희생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사진=국방일보 제공)

빛나는 활약에 이은 장렬한 최후

766유격부대의 근거지를 알아낸 17연대는 평소 가장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하던 9중대 3소대에 습격임무를 맡겼다. 특공대를 선발할 때 가장 먼저 지원한 이들이 홍재근·김용식 이등병이었다. 더욱이 이들은 전투경험이 많은 고참병들도 쉽지 않게 생각하는 돌격작전의 첨병을 자원했다.

이들의 목숨을 사리지 않는 활약으로 적의 은거지는 초토화됐으며,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북한군 766유격부대는 북한군 12사단에 흡수돼 사라졌다.

8월 24일 펼쳐진 비학산 쟁탈전에서도 이들은 또다시 공격대열의 선봉에 섰다. 김 이등병은 군관을 덮치며 허벅지를 찌르고, 홍재근 이등병은 경기관총 사수와 부사수의 옆구리를 찌르는 등 분전을 펼쳐 15명의 적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엄청난 전과를 거뒀다.

비학산 전투 이후 홍재근 이등병은 자교리 전투에서 북한군과 백병전을 전개해 적 5명을 처치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적의 대검에 무수히 찔린 채 최후를 마감했다. 정부는 홍 이등병의 희생정신과 감투정신을 높이 평가해 1951년 7월 26일 태극무공훈장과 일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김용식 이등병은 1950년 9월 19일 안강 시가지 전투에서 척후 임무를 맡아 정찰활동을 하던 중 북한군의 만행을 목격한 뒤 소대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적 6명과 전투를 벌여 이들을 모두 사살하고 자신도 그 자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김 이등병의 무훈을 높이 평가해 1951년 7월 26일 군인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으며, 1954년 10월 15일에는 화랑무공훈장과 일계급 특진이 추서됐다.

중공군의 기세를 꺾은 김옥상 육군일등병

김옥상 육군일등병은 중공군이 한국에 침입해 온정리와 운산에서의 초전에 승리한 후 청천강 부근까지 침공했을 때, 개천-비호산 부근 전투에 참전해 결사적인 육박전으로 중공38군을 격퇴하는 데 기여했다. 이 전투는 중공군의 기세를 꺾는 계기가 됐다.

1928년 7월 15일 경북 대구시 봉덕동에서 태어난 군번 0120358의 김 일등병은 1950년 8월 24일 입대, 7사단 5연대 소속으로 참전했다.

그는 1950년 9월 4~13일까지 전개된 영천 전투에 참가한 후 총반격에 나서 안동-청주-양평-포천-양문리로 이동했으며, 10월 9일에는 38도선을 돌파하고 북진 행렬에 동참했다.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한 이후 김화-평강-강동-평양-순천선을 따라 북진을 계속해 10월 22일에는 구장동까지 진출했으나, 11월 1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개천으로 철수, 비호산 전투에 임하게 됐다.

김 일등병은 치열한 공방전을 치르며 적을 패퇴시키고 비호산 점령을 눈앞에 둔 6일 공훈을 세우며 스러졌다. 적의 전초진지에 접근해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그는 돌연 1개 소대의 적 병력이 출현하자 단신으로 결사적인 육박전을 전개해 다수의 적을 살상하고 장렬한 최후를 맞은 것.

김 일등병의 살신보국에 힘입어 우리 군은 중공군과의 대결에서 첫 승리를 거뒀으며, 중공군에 공포심을 느끼던 국군과 유엔군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공로로 1954년 6월 25일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그의 유해는 1960년 5월 22일 국립서울현충원 사병묘역 30-26326에 안장됐다.  

군사편찬연구소 발간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간행물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은 전쟁 기간 중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거나, 전 장병의 귀감이 되는 희생적 임무 수행, 전술·전략적으로 전사에 기릴 만한 업적을 달성한 태극무공훈장 수훈자 60명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인물들을 계급별로 분류하면 장성 49명, 장교 4명, 부사관 4명, 병사 3명 등으로 병사들이 태극무공훈장을 받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병사 계급의 태극무공훈장 수훈자들은 각각 개전 초 북한군의 기습남침 시기와 중공군의 개입으로 우리 군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분연히 일어나 뛰어난 용기를 발휘했다는 특징이 있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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